절묘하고 유한한 음의 흐름에 매료|「겔바」의 피아노연주를 듣고|김정길(서울대음악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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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말 좋은 연주를 듣는 기회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특히 서울에서 세계적인 연주가를 그 황금기에 대하는 일은 더구나 힘드는 일이다.
지난9일 하오7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있었던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중 가장 뛰어난「레오나르도·겔바」의 무대 (중앙일보사초청)는 그런 뜻에서 모든 일들을 제쳐놓고 찾았어야했다.
처음 마음은 불안했다. 피아노에서 표출되는 살아있는 음향이 얼마나 그 큰공간을 가로질러 들렸을까 해서였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은 피아노 음향만으로 채우기에는 너무나 넓은 공간이며 소리란 시간과 공간을 견디지 못하면 생명없이 소멸해 가는 뜻 없는 울림만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아마비로 불편한 걸음걸이로 조심스럽게 피아노까지 걸어나왔던 그의 손끝에서「베토벤」 의 『비창소나타』 서주부의 강렬한 것 음군이 깊고 중후하게 울리자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황금을 발견하듯 나는 마음을 졸이고 그 다음 소리를 뒤좇고 있었다.
빠른 제1추제로 이어지면서 피아노를 가지고 소리와 소리사이에 어떻게 해서 그렇게 이어 갈 수 있는지 절묘하고 유연한 흐름에 악장이 끝날 때까지 숨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 악장의 아름다움, 그 미묘한 음향까지 음미하려는 청중들에게 냉방이 가동되어 일 어 나는 바람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이날의 큰 감동은 「베토벤」의 『변주곡』 과 「무소로그스키」의 『조곡』 이었다.
주제 제시에서 벌써 그 작은 두 손으로 그 넓은 공간과 그 많은 사람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작고 작은 절묘한 피아니시모가 피아노를 떠나 그 넓은 공간 저 멀리까지 감싸는 듯 퍼져갔고, 오히려 격렬하고 큰 음향이 피아노임을 자각케 하며 무대 위 피아노주위에서 울리고 있었다.
단숨에 몰아치는 「망조곡』에서 중요한 주제가 연주되고 한곡 한곡 이어질 때마다 천의 얼굴을 보는 듯 울림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장중함과 두려움, 그 뒤에 맑고 티 없는 순진함과 경쾌함이, 그리고 평화스런 꿈의 세계로 자유스럽게 건너뛰게 하고있었다. 정말 더할 나위 없는 피아노음악의 극치를 맛보게 했다.「겔바」의 무대는 완벽한 것이었다.
『건강한 우리들은 무엇을 했지』 어느 음악가의 자탄의 소리를 들으면서 연주회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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