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소녀 입에서 8개 국어 술 ~ 술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지현이는 뉴질랜드에서 산 지 얼마 안 돼 영어를 못해. 하지만 한국말은 잘 하잖아. 머잖아 2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게 될 걸?"

늦깎이 유학생인 부모를 따라 세 살 때 뉴질랜드로 이민 간 임지현(15)양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영어도 못 하고, 생김새도 이상하다며 놀려대던 급우들이 졸지에 그를 '2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아이'로 떠받들게 됐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갖고 영어 공부에 매달린 끝에 지현이는 1년 만에 학교 내 철자법 대회에서 1등을 했다.

지현이의 욕심은 '2개 국어'에서 그치지 않았다. 옆집에 살던 일본인 할머니에게 과자를 얻어먹을 욕심으로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혔다. 중학교 땐 짝사랑했던 소년 디에고의 관심을 끌려고 그의 모국어인 스페인어 공부에 열을 올렸다. 자원봉사하러 다니는 양로원의 중국 할머니와 친해지기 위해 중국어를 배웠고, 멋진 패션과 맛있는 음식에 대한 관심으로 프랑스어도 공부했다. 또 영화에서 들은'다(Da.'네'의 뜻)'라는 말에 매력을 느껴 배운 러시아어와 라틴어 실력 역시 수준급이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기대를 뛰어넘어 8개 국어를 구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외국어 공부가 좋기만 했을까. 그의 어머니인 진양경(47)씨는 "다른 아이들이 음악 듣고 춤추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지현이에겐 외국어를 배우는 게 즐거운 취미"라고 했다.

하긴 지현이의 외국어 공부법이 독특하긴 하다. 문법과 단어를 달달 외는 식이 아니다. 처음 외국어를 접하면 이미 할 줄 아는 언어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분석해가며 문장의 구조부터 익힌다. 다음엔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발음을 연습하고, 영화와 노래를 통해 다양한 표현을 배우는 것이다.

지난해 현지 중국문화원이 주최한 중국어 말하기 대회에 입상한 데 이어 올 8월 프랑스문화원 주최 프랑스어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그는 뉴질랜드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이같은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며 최근 '외국어 8전 무패'(이미지박스)라는 책까지 펴냈다.

"조기유학 온 아이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한국 친구들하고만 어울리는 게 안타까웠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을 잘 표현하려면 외국어를 제대로 하도록 애써야 한다는 얘길 하고 싶었지요."

독일어와 이탈리아어에도 도전할 생각이라는 지현이는 "대학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한 뒤 유엔에서 일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최근 박사학위를 땄고, 어머니는 한국인 유학생을 위한 영어기숙학원(홈 스테이)을 한다.

글=신예리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