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CoverStory] 원조는 미국 … 90여만 권 여행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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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은 뒤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공공장소에 놔두는 것. 이 아이디어가 참신하다고 할 순 없다. 이탈리아에서는 오래전부터 서점 주인들이 책을 정기적으로 길거리에 풀어놓았단다. 책 읽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 프랑스에서도 한때 지식인 사이에서 더 이상 필요 없는 책을 거리로 '환원'시키는 행동이 유행했다. 비록 책은 아니지만 다 읽은 신문을 다른 승객을 위해 선반에 두고 내리는 한국의 지하철 문화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북 크로싱'이라고 정의하고 인터넷과 연계해 문화운동으로 발전시킨 공로는 론 혼베이커(37.미국)의 것이다. 2001년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그는 한 인터넷 사이트를 보고 북 크로싱 운동을 생각해냈다. 싸구려 카메라에 필름을 끼워 아무나 사진을 찍게 한 뒤 나중에 수거, 인화해 보는 사이트. 여기서 영감을 얻어 읽기(Read).등록(Register).방출(Release)이라는 '3R 슬로건'을 정한 그는 곧바로 www.bookcrossing.com이란 사이트를 열었다.

이렇게 탄생한 북 크로싱의 '메카'는 아직도 건재하다. 회원이 무려 20여 만 명. 요즘도 하루에 수백 명씩 회원이 늘고 있다. 이 사이트를 통해 그간 풀려난 책도 90여 만 권에 이른다. 한국에서 손 꼽힌다는 국회도서관의 장서가 220만여 권. 그러니 어지간한 대학 도서관 하나는 채울 양이다.

이 같은 미국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북 크로싱이 한국 땅에 상륙한 것은 지난해. 카페 '책에 날개를 다는 사람들'을 비롯, 사이트 3~4개가 앞다퉈 문을 열었다. 그러나 1년여가 지난 오늘날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현재 사이트 대부분은 개점 휴업 중. 아예 문을 닫아 버린 사이트도 있다. 꾸준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곳은 '책에 날개를…' 정도다.

책은 소중한 것이어서 함부로 내돌릴 수 없다는 고정관념. 모르는 사람의 호의를 공연히 의심하는 닫힌 마음. 무엇보다 책을 읽지 않는 풍토.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 북 크로싱 확산을 막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대해 '책에 날개를…' 운영자 차우진(30)씨는 "북 크로싱은 작게는 책 읽기 운동이지만 크게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대안문화운동"이라며 "안정적으로 책을 교환할 수 있는 부스를 설치해 주는 등 지방자치단체들의 도움이 있으면 국내에서도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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