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 "해외서도 고문은 안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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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미국인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고문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우크라이나를 방문 중인 콘돌리자 라이스(사진) 미 국무장관이 7일 키예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라이스 장관의 발언은 "해외에서는 예외"라던 미 정부의 기존 입장을 뒤집은 것이라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가 8일 보도했다. 지난달 초 미 중앙정보국(CIA)이 동유럽에 비밀수용소를 만들어 테러 용의자들에게 고문 등 가혹 행위를 했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 미국은 국제 사회의 빗발치는 비난에 시달렸다.

미국 내에서도 존 매케인 상원의원(공화당)이 제안한 고문금지법이 압도적으로 통과되는 등 미군과 CIA의 가혹행위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았다.

◆ 한발 후퇴한 미국=라이스는 이날 "고문방지협약 가입국으로서 미국의 의무는 전 세계에 있는 미국인에게 해당된다"고 말했다. 그동안 알베르토 곤살레스 미 법무장관 등은 "유엔 고문방지협약은 해외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신문하는 미국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1987년 발효된 유엔 고문방지협약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네오콘들은 테러 용의자들을 효과적으로 신문하기 위해서는 가혹 행위(사실상 고문)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한 미국 내에서 가혹 행위는 불법이다. 그래서 네오콘들은 '협약이 적용되지 않는' 해외에 비밀 수용소를 만들어 테러 용의자를 감금했다.

◆ 왜 물러섰나=미국이 국내외의 여론을 무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외신들의 분석이다. 유럽 순방 중인 라이스는 도착하는 나라마다 CIA 수용소와 고문 행위에 관한 질문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독일 등 유럽과의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당초의 순방 목적은 무색해졌다. 결국 미국은 고문 행위에 대한 입장 전환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 유엔 비난=라이스 발언과 별도로 루이즈 아버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은 이날 "CIA 해외 비밀수용소 운영은 국제적인 고문 방지 노력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각국 정부는 명백한 위험에 처했을 때 국민의 권리에 일부 제한을 가할 수는 있지만 고문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허용돼서는 안 된다"라며 "미국은 이번 일로 국제 사회 내에서 도덕적 리더십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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