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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같은 속물의식, 갑과 을이 따로 없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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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상류층 부부의 10대 아들이 만삭의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오며 시작된 SBS 월화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사진 각 방송사]

지상파TV의 주말·일일 드라마가 대개 가족극의 큰 틀에서 움직인다면, 평일 밤 드라마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곤 한다. 요즘 SBS 월화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이하 ‘풍들소’)가 좋은 예다. 대대로 법조 명문가인 상류층 부부(유준상·유호정)의 집에 미성년자 아들(이준)이 만삭의 여자친구(고아성)를 데려와 시작된 블랙 코미디다. 탄탄한 캐릭터, 예측불허의 전개를 설득력 있게 펼치며 시청률 역시 4주 연속 10%를 웃돌고 있다.

 안판석 PD·정성주 작가는 정통드라마였던 JTBC ‘아내의 자격’(2012), ‘밀회’(2014)에서도 중산층·상류층의 허위의식·속물근성을 빼어난 솜씨로 그려낸 콤비다. ‘풍들소’는 유준상·유호정이 연기하는 한정호·최연희 부부가 풍자의 주요 대상이다. 아들의 여자친구가 별 볼 일 없는 서민 딸인 걸 알고 처음엔 거액의 돈을 제시하는 모습이 막장드라마의 상투성을 연상시켰지만, 갈수록 전개가 변화무쌍하다. 급기야 부부는 반갑지 않은 며느리 서봄(고아성)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아들과 함께 사법시험 준비까지 시킨다. ‘이종교배를 두려워하면 발전이 없다’는 논리다. 매번 탁월한 말솜씨로 상황을 정리하면서도, 헛발질을 하곤 하는 모습이 웃음을 안긴다.

광해군이 등장하는 MBC 사극 ‘화정’이 13일부터 같은 시간대에 방송된다. [사진 각 방송사]

지난 9일 경기도 남양주 세트에서 만난 두 배우는 “대본에는 코미디가 흘러도 연기가 코믹으로 흐르면 안 된다”(유준상), “웃기려는 게 아니라 더 진지하고, 진실되게 연기해야 보는 분들이 웃는다”(유호정)고 입을 모았다. 이런 ‘갑’만 풍자의 대상은 아니다. 서봄의 친정 식구들은 갈수록 명문가 사돈의 도움을 공공연히 기대한다.

 최근에는 아직 10대인 며느리 서봄의 놀라운 성장이 화제다. ‘밀회’의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유아인)처럼 순수함이 두드러졌던 서봄은 이제 시어머니의 비서를 훈계·조련까지 한다. 배우 고아성은 “사법시험을 준비할 줄도, ‘권력의 맛’을 알게 될 줄도 몰랐다”며 “한 치 앞을 모르는 전개가 어떤 소설보다 재미있다”고 말했다. 반면 서봄과 사랑에 빠진 한인상(이준)은 부잣집 아들이면서도 극 중 다른 상류층 자녀들과 다르다. 배우 이준은 “비싼 옷은 절대 입지 않고, 휴머니스트라서 가죽 옷도 입지 않는 인물”이라며 “부잣집 아들인 줄 서봄이 몰랐던 것도 그래서”라고 설명한다.

 ‘갑’의 속을 긁는 또 다른 ‘갑’도 있다. 부부의 친구이자 대기업 회장 부인인 지영라다. 이 역으로 연기에 처음 도전한 백지연은 “친정·시댁 모두 돈의 힘을 가진 데다 눈치 안 보고 할 말 하는 캐릭터”라며 “아무도 못 건드리는 한정호네에 대고 바른 말을 하거나 속아픈 소리를 하곤 한다”고 설명했다. 상투성을 벗어난 캐릭터·전개에 대해 유호정은 “사람 사는 게 그렇지 않냐”며 “갑이 을이 될 수도 있고, 갑질의 와중에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심리가 어떤 건지 대본에 워낙 잘 쓰여 있다”고 전했다.

문화평론가 공희정씨는 “유준상·유호정부터 그 집의 비서·집사 등 조연까지 연기가 탄탄해 흡입력을 발휘한다”며 “‘밀회’ ‘아내의 자격’도 그랬지만, 안판석·정성주 콤비의 드라마엔 상류층의 위선에 대한 폭로만 아니라 갑이나 을이나 인간은 똑같단 시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30회 중 중반에 접어든 ‘풍들소’는 이번 주부터 한층 강력한 경쟁자와 맞붙는다. 13일 시작하는 MBC 50부작 사극 ‘화정’이다. 조선 선조의 딸 정명공주(이연희)를 주인공 삼아 선조-광해군-인조 시대를 그릴 예정이다. 역사 속의 정명공주는 배다른 오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큰 고초를 겪었다. 사극의 주인공으론 낯선 인물인 데다, 극 중 남장을 하는 등 팩션의 요소를 가미한 점도 이 드라마의 전개를 궁금하게 만든다. 초반은 어린 공주보다 광해군(차승원)의 활약이 주목된다. 직전에 ‘삼시세끼-어촌편’(tvN)으로 인기몰이를 한 차승원은 7일 제작발표회에서 “새로운 광해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 MBC의 장기 사극은 ‘대장금’ ‘선덕여왕’ ‘동이’ 등 특히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굵직한 히트를 기록해왔다. 그중 ‘동이’와 ‘이산’을 쓴 김이영 작가가 ‘화정’도 쓴다. 제목은 연출자 김상호 PD가 정명공주가 남긴 ‘화정(華政)’이란 글씨를 간송미술관에서 보고 따왔다. ‘화려한 정치’를 뜻한다는 점에서 드라마 내용과 반어적이란 게 제작진의 설명이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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