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아난 총장, 아시아 순방 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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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 아난(사진) 유엔 사무총장이 4일부터 아시아 지역을 순방하려다 전체 일정을 연기했다고 유엔이 1일(현지시간) 발표했다. 7~9일로 잡혔던 한국 방문 일정도 함께 연기됐다.

아난 총장은 13일 홍콩에서 개막하는 세계무역기구(WTO)각료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중국.한국.일본.베트남을 차례로 방문키로 했었다. 유엔은 "아난 총장이 예산 처리와 관련한 긴급한 문제로 순방을 취소할 수 밖에 없음을 관련국들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한국 외교부도 "유엔 측이 공식 발표 직전에 연기 사실과 함께 '갑작스럽게 통보하게 돼 미안하다'는 뜻을 우리 정부에 전해왔다"고 확인했다. 아난 총장의 순방이 돌연 연기된 것은 통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엔의 예산 때문이다. 유엔의 정규 예산은 2년에 한번 편성된다. 때문에 최근 유엔에선 2006~2007년 정규 예산안이 연내에 통과되느냐가 중요한 화두다. 그런데 유엔 정규 예산(2년에 36억 달러)의 22%를 담당하는 미국이 강하게 제동을 걸고 나섰다.

미국은 "사무국 운영 개선을 비롯한 유엔 개혁 과제가 원만히 추진되기까지는 2년 단위의 예산이 아니라 3~4개월의 잠정 예산만 편성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방만한 유엔 사무국의 운영과 회원국들의 반미주의 경향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예산 압박으로 나타난 것이다. 최근 부시 행정부의 대표적인 강경파인 존 볼턴이 주 유엔 대사가 된 뒤 압박의 강도가 더 강해졌고, 연내에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못할 급박한 상황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당초 유엔 측은 미국의 압박을 그저 '엄포용'으로만 파악했다가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결국 아시아 순방까지 연기하게 된 것 같다"며 "직원들의 봉급조차 확보하지 못할 판에 사무총장이 외유하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 유엔 한국대표부 관계자도 "당장 내년 상반기에만 최소한 4억5000만~5억 달러의 예산이 필요하지만 현재로선 1억7000만~1억8000만 달러만이 확보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연기된 순방이 올해 안에 다시 이뤄지기는 힘들 것"이라며 "내년으로 넘어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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