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병사의 희망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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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트레이닝 데이'에서 부패한 경찰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탄 덴절 워싱턴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흑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흑인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문화적.역사적, 그리고 유전적 배경이 흑인이지만, 그게 내가 답해야 할 모든 건 아니다."

그의 감독 데뷔작 '앤트원 피셔'는 이 말과 일맥상통한다.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휴먼 드라마지만 흑백의 차이를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감성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보기에 따라 단조로울 수 있다. 현란한 특수효과도 없고, 절묘한 반전도 없다. 시끌벅적한 액션 또한 생략됐다. 단지 기승전결이란 고전적 기법을 충실히 따라간다. 상처받은 한 인간의 자아발견, 나아가 희망 찾기란 소재도 다분히 상식적이다. 그래서 결말 또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워싱턴은 바로 그걸 노린 것 같다. 액션 스타, 떠벌이 개그맨, 잔인한 범죄자 등 할리우드 영화에서 상투적으로 그려진 흑인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돌려주려고 했다.

앤트원 피셔(데릭 루크)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흑인 양부모 밑에서 자란 미 해군 하사다.

상관을 폭행해 일계급 강등된 그는 정신의학과 장교 제롬 데이븐포트(덴절 워싱턴)를 만나 잊고 지내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찾아나선다.

이름이 있으면서도 단지 '깜둥이'로 불렸던 그 고통스러웠던 시절로 돌아가 옛날의 상처를 치유한다. 잃어버렸던 가족 사랑도 되찾는다.

제작.감독.주연, 1인 3역을 맡은 워싱턴은 이런 평범한 플롯에 곁가지를 하나 붙였다. 폭력 성향이 강한 앤트원을 상담,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사 제롬 또한 한 단계 성숙한 인물로 발전한다. 둘 사이의 긴장과 갈등, 그리고 화해가 영화를 끌어가는 동력이다. 영화에선 백인에 대한 원망, 혹은 한풀이가 나오지 않는다.

감독은 흑백 차별이란 사회.정치적 이슈 대신 거친 환경에 무릎 꿇었던 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내면과 힘겨운 재기에 집중한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교과서 같은 느낌을 준다. 인간적 감동은 살아있으나 영화적 새로움을 찾아보긴 어렵다.

다만 이처럼 익숙한 소재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화면에 옮긴 워싱턴의 기본기는 확인할 수 있다. 마음 한 구석을 따뜻하게 데우는 이 영화는 극작가 앤트원 피셔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30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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