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의 일기' 코트의 사령관이 숙소선 빨래 담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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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장수동의 인천대공원 후문 근처에 프로농구 전자랜드의 숙소가 있다. 22일 한 여성이 숙소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빨래하던 전자랜드의 신인 정재호(23)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여보세요. 왔어? 알았어, 알았어. 뭐하고 있느냐고? 빨래하지. 금방 나갈게." 모처럼 쉬는 날이지만 외출이 힘든 정재호를 만나기 위해 여자 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정재호는 2005~2006시즌 프로농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 가드다. 하지만 팀에서는 막내다. 빨래는 당연히 막내의 몫이다. 정재호의 입을 빌려 '루키의 하루'를 구성해 본다.

나? 넘버원 루키 정재호! 근성 있고 성질 있고, 무엇보다 실력이 된다. 코트에서는 1번(포인트가드), 야전 사령관쯤 될까. 팀 성적은 좋지 않지만 어느 팀 누구와 만나도 난 꿇리지 않는다. 하지만 빨래도 하고, 아이스박스도 챙기고, 심부름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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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집어 놓은 양말의 저주=빨래는 힘들다. 세탁기가 있는데 무슨 엄살이냐고? 나는 선배 두 명 것과 내 것을 합해 세 명분의 빨래를 해야 한다. 매일 훈련하는 운동선수의 빨랫거리는 만만치 않다. 산더미다. 모아서 세탁기 돌리고, 꺼내고, 널고, 분류하고, 개고, 갖다 놓는다. 이 중에서도 제일 무시무시한 건 뒤집어 벗어 놓은 양말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빨간 양말과 하얀 양말이 저주를 벗어던졌다는데, 이곳 숙소에서는 양말의 저주가 끊이지 않는다. 뒤집혀져 있는 양말을 보면 정말 참담하다. 난 장가 가면 절대 양말 뒤집어 놓지 않으리라 맹세한다. (이때 여자 친구가 한마디한다. "네 양말은 네가 빨지.")

◆ 아이스박스 메면 슛 안 들어간다=얼음 넣고 물 넣으면 20㎏은 족히 나가는 아이스박스. 선수 이동 때마다 난 아이스박스를 챙겨야 한다. 동기 (서)동용이는 수건을 챙긴다. 아이스박스 들고 가방 메면 어깨 빠진다. 지난 시즌 아이스박스 담당이었던 (김)도수 형이 "내가 지난해 왜 슛이 안 들어갔는 줄 아느냐. 다 아이스박스 때문이야"라고 말하며 휭 지나간다. 더 밉다.

◆ 대화도 훈련=훈련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신인이라고 더 뺑뺑이 돌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훈련을 몸으로만 하는 건 아니다. 입으로도 한다. 내가 신인이라는 것과 포지션이 포인트가드라는 점, 이 두 가지 때문에 대화는 더욱 중요하다. 시즌 초반 외국인 선수 리 벤슨은 불만이 많았다. "나는 신인이다. 포인트가드도 익숙하지 않다. 대학 때까지는 2번(슈팅 가드)을 주로 맡았다"고 하자 벤슨은 "루키라도 넌 포인트가드다. 코트를 지휘해야 한다. 봐줄 것도 없고 주눅 들 필요도 없다"고 했다. 괜찮은 친구다.

◆ 취침 전, 살 떨리는 한마디=나른한 몸을 침대에 눕힌다. 막 잠이 들 것 같은 순간, (김)택훈이 형이 졸린 목소리로 말한다. "재호야, 나 목 말라." 우씨, 냉장고는 아래층에 있는데. 더 귀찮은 것도 있는데 그건 생략.

◆ 여자 친구와 전화하다 잠자기=만난 지 얼마 안 됐다. 동네 친구 소개로 올 여름부터 만났으니까. 그런데 오래오래 만나고 싶다. '복덩이'(23.둘 사이에 부르는 애칭)는 최고 명문대 법대에 다니고 있다. 고시 준비 중이다. 그래도 수도권에서 경기가 있으면 자주 온다.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이 버스를 타러 나가는 길목에 서서 기다린다. 정말 반갑다. 확 가서 끌어안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버스에 오르면 나는 맨 뒷자리로 간다. 여자 친구는 버스 창밖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우리는 눈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버스가 출발하면 택시를 타고 숙소까지 따라온다. 그리고 얼굴 한번 더 보고 서울로 올라간다. 외출하고 싶다. 결혼한 선배들이 부럽다. 집에 갈 수 있으니까.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에만 만난다. 그래서 전화의 힘을 빌린다. 전화하다 잠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인천=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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