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안빈」실천한 시골선비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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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강원도 명주군 성산면 위촌리-.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산·산·산뿐인 산 마을.
백설 휘날리는 대궁산성 너머 황혼이 붉게 탄다. 마을 전체 70여 가구 4백여명이 몽땅 강릉함씨들.
인향조는 조선 선조 때 진사 함구명.
그의 선조인 함신이 신라 때 명주군왕 김주원을 따라 명주 땅에 뿌리를 내렸기에 후손들이 이 지역 일대에 못자리를 잡은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위촌은 예부터 산 높고 물 맑기로 유명한 곳. 「노령낙조」 「옥천비포」 「연봉소죽」「석탑노송」「황천명월」등 절경은 지나는 객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한다.
함구명은 이 절경 속에서 음풍영월로 살았다. 사색당쟁으로 얼룩진 선조조의 혼탁한 사회에서 벼슬에 오르는 것은 부질없는 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벼슬을 탐하지 말고 맑게 살아라.』 그가 후손들에게 남긴「청반론」이다. 이 같은 청반으로서의 기질은 고려의 절신 함전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함전실은 조선개국 후 강릉 산야에 묻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고 이에 탐복한 세종이 사후에 예조판서를 추증했던 인물이다.
「청빈·안빈」의 가훈 때문인지 그의 후손 중에는 큰 벼슬한 인물은 없단다. 그러나 글 잘하는 선비는 많았다. 대표적 인물이 함구명의 손자인 함천계. 그는 당대의 기재 허균과 함께 산수를 읊었던 「영동의 묵객」이었다.
조선중기 이후 과거제도는 종종 권문세도가의 손에서 놀아났다. 이 때문에 지방의 선비들은 과거에 뜻은 두었으나 이른바 「빽」이 없어 등과 길이 막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같은 시골선비의 자화상을 함천계는 자조적인 시로 남겼다.
『삼등계 (계=과거를 뜻함) 전계무화 차타미수평생지 백수공명통오가 (3번 계수나무에 올랐으나 꽃을 피우지 못하니, 평생의 뜻을 이루지 못해 슬프구나. 흰머리에 공명은 통장벼슬이 고작일 뿐…).』 주민들의 주 소득원은 농사. 10년 전부터 인근 산야를 초지로 개간, 비육우를 길러 가구 당 연평균4백 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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