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객관식출제의 문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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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제군들! 내가 이자리에 선것은 제군들보다 잘나고 위대해서가 아니라 제군들보다 조금 먼저 나선 먼저 겪은데서 느낀 점을 이야기 하고자이다.』 어느 대학입학학력고사에서 3백18점을 얻어 서울대사회과학대에 당당히 합격했던 이모군(20·l학년)이 입학후 국어시간에 쓴 작문 「입시준비생에게 보내는 글」머리 부분중 한 토막.
『우리에 대한 기대는 무척 컸으며 그래서 선생님들과 일치단결해서 입시전쟁을 치렀던 것이다.』
원고지 6장에 자신의 경험과 후배에 대한 충고로 채워진 이 글은 다시 이렇게 이어졌다.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마음가짐이다. 목적과 목표가 없는 삶은 흐지부지 백년하청이다. (중간생략)
때때로 제군들은 자기 노력에 대한 결과에 불만족하고 또 집이나 학교에서의 채찍질로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고립보다는 친구들·선생님·부모님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만약, 대화부족으로 문제의 해결이 늦어진다면 거기에 대해서 또 다른 문제가 파생되어 그런 스트레스로부터 헤어 나올 수 없게되고 심지어는 포기하게도 되는 것이다. (후반생략)』
군데군데 드러난 한자표기의 잘못은 그만두고라도 어색한 표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것이 과연 학력고사 3백18점을 딴 우백성의 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김은전교수 (서울대 사대국어교육과)는 60여만 수험생중 최상위 1%정도가 입학하는 서울대신입생이 쓴 작문가운데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력이나 논리적인 의사표현을 발견하기 힘든다고 개탄했다. 이군의 글에서 본바와 같이 용어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한자를 잘못 써 도저히 대학생의 문장이라고 보기 어려운 글이 많다는 것이다.
석학을 석학으로 쓰는가하면, 과외수업, 평범, 민속촌, 고유, 재수생, 부작용, 계절이 서울대생의 작문시간에 흔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본고사를 치를때 입학한 학생들이 보여줬던 논리정연한 표현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고 했다.
이남영교수(인문대철학과)는 『단편적인 지식은 많은 것 같으나 문맥에 함축된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리포트를 쓸때 서론과 결론이 뒤바뀌거나 수평적 기술이 지루하게 연결되는등 논리적인 사고훈련이 전혀 돼있지 않다.』고 안타까와 했다.
『공부를 안했다기보다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이교수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육만을 받아서인지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면 횡설수설하고 의사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단편적인 지식만 가졌을뿐 지식체계의 틀이 없고 지식에서 오는 인격성숙의 점도가 본고사를 치를 때보다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는 대학입학학력고사와 고교내신성적만으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중 최우수집단이라는 서울대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보다 더 낮은 점수를 얻은 학생들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최근 들어 대학가에 경박한 은어가 성행하고,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따지려드는 풍조도 실은 이들이 12년간 사지선다나 ○×식의 객관식 훈련만 받아온 때문이라는 설명이 나올 정도다.
현행입시제도가 시작되면서 학교교육에서 표현력이나 논리전개·사실의 종합등 이른바「고등정신기능」을 위한 교육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대학입학 학력고사는 전과목 2백95개의 문항이 모두 사지선다형으로 돼있고, 이 시험에 대비하고 내신성적의 말썽을 줄이기 위해 고교의 학습평가도 모두 객관식 일변도로 됐다.
국민학교나 중학교에서도 사정은 같다. ○×나 사지선다는 학습능력 측정의 유일한 방법으로 됐고, 이러한 시험에서 점수를 더 잘 얻기 위한 훈련마저 행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의사의 표현이나 논리전개 능력은 적어도 현행제도에서 대학입학시험을 치르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없고, 그런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되면 점수는 많이 얻어내기가 어렵게 돼있다.
「동물은 죽는다. ­사람은 동물이다. ­따라서 사람도 죽는다」는 논리전개방법이 삼단논법이란 것을 잘 알면서도 이같은 방법을 활용한 논리전개훈련은 전혀 받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현행시험제도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은 병폐는 대학자체에까지 번지고있어 더욱 심각하다.
졸업정원제실시로 성적순에 따라 일정수의 학생을 탈락시켜야하는 대학의 시험도 객관적인 평가를 강요당하고있어 논문식이나 문제 해결력을 평가하는 시험형태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언제까지 사지선다나 ○×식의 시험만을 강요하면서 고등정신기능교육을 외면할 것인가. <권순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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