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기와 실험정신이 부족하다|올 각지 신춘문예 당선 소설들을 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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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문단의 새 얼굴을 선뵈고 있는 신춘문예의 당선작들이 발표되었다. 새로운 목소리의 주인공들에게 걸어보는 기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에게 보내는 찬사마다 가슴 설레는 흥분마저 깃들여 있다. 자신의 이름앞에 또 하나의 명패를 달아놓고 있는 당선작가나 시인들도, 이 순간만은 그 명패의 무게가 영원히 고통의 짐이 될 것이라는 점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을것으로 생각된다.
신춘문예는 하나의 열병처럼 해마다 숱한 문학 지망생들의 머리를 들쑤셔 놓고 있다. 그러나 신춘문예의 실상은 하나의 평범한 연례행사일 뿐, 제의가 사라져 버린채 제식의 절차만 남아 있는 축제와 다를 바 없다. 신춘문예가 아니라도 문단의 등단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 활동 무대도 상당히 넓혀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춘문예는 매년 연초에 몇몇 시인·작가를 뽑아 원고료의 열배쯤 되는 상금을 수여하는 일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버리고 있는 것 처럼 느겨질 정도다. 더구나 신년벽두의 신문에 발표되는 작품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긴 하지만, 신문의 기사처럼 대부분의 독자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고만다.
당선자들의 이름앞에 붙여져 있던 화려한 장식들이 얼마나 쉽게 퇴색되어 버리는지는 신춘문예를 통과한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오른 작가·시인들이 당선을 알려주는 신문더미에 그대로 갇힌채
그곳을 뛰쳐나오지 못하고 주저앉은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도 예사로 받아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가능성은 당선된 작가와 시인들만의 몫이기 때문이다.
올해 신춘문예의 당선작들을 놓고 그 작품의 성패와 특징을 다시 논한다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다. 이미 당선작으로 선정해 놓은 심사위원들에게도 체면을 지켜야하고, 당선의 영예를 차지한 새 얼굴들에게도 찬사의 꽃다발을 덮어 씌워야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에게 무조건의 축하를 보내고 있는 일반 독자들도 비평의 인색함에 불만을터뜨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잔치 마당에서 으래 기억되기 어려운 인사치래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새 얼굴들에게는 자신의 결의를 다질 수 있는 몇마디의 충고가 더욱 긴요할 것이다.
이번 소설 당선작인 「어느 순례」(신광식·중앙일보)「새」박시옷·경향신문)「그리운 꿈」(이연철·한국일보)「새를 기다리며」(황영옥·동아일보)「물뿌리기」(문형렬·조선일보)등은 대체로 예년의 수준을 벗어서지 못하고 있다.
소설적 구도가 안정되어 있긴 하지만 지나치게 평범하다는 인상을 떨쳐버릴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솜씨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주제의식이 약화되어 있기 때문에 신인다운 패기와 실험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어느순례」의 경우를 보면 상황 설정과 분위기의 처리가 돋보이지만 단편이 요구하는 인상의 통일이나 주제의 일관성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지 않다.
비교적 수준작이라고 할수있는 「새」도 주인공의 내면의 갈등을 형상화시켜 놓지 않고 오히려 결말의 극적 효과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새를 기다리며」에서는 아버지와 딸 사이의 관계 설정이 사건의 핵심에 해당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주제로 결합시켜 놓는 설득력이 약하다.
뿐만아니라 당선작들 중에는 문체의 감응력을 소홀히 하고있는 작품도 눈에 뛴다. 문장수련의 미숙성이라고 지적한다면 지나친 혹평이 될지 모르지만 지배적 인상을 포착해야하는 묘사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술의 힘에도 흡족하지 않은 점이 많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새를 기다리며」는 묘사의 구체성을 살려내지 못하는 필요없는 말장난이 심하다. <팽창하는 압력의 극한에서 자폭하는 나의 욕망>과 같은 투의 문장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작중인물의 심리상태와 상관없이 작자 자신의 감정을 내뱉듯이 남용하고 있는 추상적인 관념어들이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오산이다. 표현의 적절성이란 하나하나의 단어의 선택에서부터 신중을 기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다.
이런 예는「어느 순례」나「물뿌리기」도 마찬가지인데, 하나의 습벽으로 굳어지기 전에 고쳐 나아가야 할 일이다. 문장의 호흡을 비교적 균형있게 조절하고 있는「그리운 꿈」도 군데군데 함부로 쓰여진 말이 적지 않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들 당선작에는 주제에만 매달리는 성급한 열정대신에 한결같은 침착성이 깔려있고, 소재의 신기성을 찾지 않고 일상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자 하는 노력도 담겨 있다.
이러한 특칭이 소설적 미덕으로 착실하게 커나아갈 때, 작가라는 명패가 더욱 소중한 의미를 지닐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자기혼자서 걸어가야 할 소설의 길이 시작된다. 길이 시작되자 그 여행은 이미 끝났다고 하는 소설적 역설이 서서히 실감으로 느껴질 것이다. 새로운 목소리의 새얼굴이 모두 문단의 새로운 정신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고 싶을 뿐이다. <권영민·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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