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역이사람] 오지 농민에 희망 준 '오이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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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농업기술센터 손상돈씨가 오이수확을 마친 오이밭에서 내년 농사에 대비, 토질검사를 하기 위해 흙을 담고 있다. 상주=조문규 기자

21일 오전 상주시 화동면 평산리의 한 농가. 상주시농업기술센터의 손상돈(45.6급) 화동면농업인상담소장이 주민 김래갑(51)씨의 집을 방문하자 온 식구가 반갑게 맞는다. 김씨는 올해 자신의 밭 600평에 여름 오이를 재배해 2200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포도 농사를 짓던 김씨는 "손 소장이 권유해 올해 처음 오이를 재배했는데 횡재했다"고 말했다. 산골 오지 농민들이 한 농촌지도직 공무원의 아이디어 덕에 '부농(富農)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손 소장이 조직한 '팔음산 오이작목반'(회장 유건오.56) 소속 200여 농가는 올 여름 54㏊에 오이를 재배해 28억원의 매출액을 올렸다. 가구당 평균 1400만원꼴이지만 일부 농가의 소득은 1억원에 육박한다. 4월 말께 노지(露地.비닐하우스가 아닌 밭)에 파종해 8월 말까지 '반짝 출하'해 올린 소득이다. 회원 대부분이 벼.포도.채소 등 다른 농사를 함께 짓는 것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소득이다.

손 소장이 주민들에게 노지 오이 재배를 권유하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상주 토박이인 그는 86년 상주시 농촌지도소에서 9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고향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다 오이를 떠올렸다. 해발 762m인 팔음산 주변의 여름철 기온이 전국 평균보다 5도가량 낮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최적의 기온에다 시설재배처럼 투자비가 거의 들지 않는 노지재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는 주민 6명으로 '팔음산 오이작목반'을 만들었다. 첫해 작목반에 가입한 서재만(44)씨는 "처음엔 미심쩍었지만 손 소장이 가르쳐 준 대로 하니 소득이 엄청나게 늘었다"며 "올해는 오이 판매로만 3000만원의 소득을 올렸다"고 자랑했다.

손 소장은 2001년 새로운 오이 품종인 '백다다기'를 개발했다. 기존 오이는 딴 뒤 하루만 지나면 양쪽 끝이 노랗게 변해 소비자들이 시든 것으로 오해하는 등 다소 문제가 있었다. 그는 한 종묘사에 의뢰해 상주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품종을 만들었다.

제값을 받기 위해 포장에도 신경을 썼다. '상주 생오이'로 브랜드를 통일했다. 그 결과 따로 포장 박스를 만들 때보다 비용이 연간 1억5000만원 절감됐다.

손 소장은 판로도 직접 뛰며 개척했다. 서울.대전 등의 농산물 공판장 중도매인들을 찾아다니며 식사를 대접하고 오이를 시식하도록 했다. 또 재배 현장에 초청해 오이의 품질을 테스트하도록 했다. 손 소장은 "처음엔 반응이 시큰둥했으나 곧 품질이 괜찮다며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고 했다. 현재 상주의 백다다기 오이는 수도권의 여름철 오이 소비량 가운데 60%를 차지하고 있다.백다다기는 오이 표면이 흰색을 띠면서 아삭아삭해 소박이.김치 등의 재료로 쓰이며 주로 수도권에서 소비되고 있다.

'오이 박사''농업 해결사'…. 그에게 붙은 별명이다. 손 소장은 "앞으로 인터넷을 통한 화상시스템을 구축해 농업지도를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상주=홍권삼 기자<honggs@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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