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901>제80화 한일회담 (100)|예비회담 마무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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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측은 한일예비교섭이 상당히 진척되자 제4차 한일회담이 곧 열릴 것으로 예상해 수석대표 인선을 검토할 정도였다. 57년5윌 중순께였다.
주유엔대사를 지내고 외무성고문으로 있던 원로외교관「사와다」(澤田廉三) 씨, 주미대사를 차례로 지냈던「이구찌」(井口貞夫·제1차한일회담수석대표) 씨 및「다니」(谷正之) 씨등 4, 5명이 고려되고 있다고 주일대표부는 5월14일 보고해왔다.
이런 정보와 예비교섭의 진척상황등을 종합해볼때 곧 정식회담이 열릴 전망이어서 정부는 내 후임 정무국장이 된 김영주씨(전 외무차관·현 본부대사겸 남북한총리회담실무회의 수석대표) 를 일본에 보내 김대사를 돕고 회담준비작업을 하도록 했다.
예비회담의 최대장애였던 일본의 대한재산청구권포기문제도「기시」수상의 적극자세와 김대사의 비상한 노력으로 해소되어가고 있었다.
김대사는 「오오노」차관과의 예비교섭 과정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말할 수 없는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좋은 경험을 했다고 들려주었다.
「오오노」차관등 일본측대표들은「기시」수상의 대한재산청구권주장철회 방침과는 달리 계속 우리의 대일재산청구권주장과 상쇄해야 된다고 완강하게 버텼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대사는 6월11일 실무자들과는 골백번 논의해봐야 진전이 없을 것 같으니 차라리 「기시」수상을 다시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 회의를 중단시킨후「기시」수상을 찾아갔다.
6월초순 김대사는 2, 3일마다 한번씩은 「기시」수상을 만났고「기시」수상도 방미를 며칠 앞두고 어떻게 하든 이 문제를 해결 짓고 떠나겠다는 입장이어서 면담이 바로 실현되는 분위기였다.
김대사는「기시」수상에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수상께서 바라는 한일회담의 타결을 전제로 하는 얘기입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얼마가 되든 결국 한국의 청구권을 인정하게될 것이 아닙니까
일본사람들이 한국에서 착취한 재산을 그대로 놓고 왔다고 해서 한국의 대일재산청구권이 없어진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결론은 뻔한데 사소한 문구의 표현을 가지고 이토록 고집을 하니 일본측의 의도가 예비회담을 결렬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는 일본측이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더이상 회담에 응할수 없읍니다.』「기시」수상은 김대사의 회담참석 불응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지 당장 예비회담의 일본측 대표인「미야께」(三宅)참사관을 수상실로 불러『한일회담은 양국이 선린우호국으로서 서로 협력해나가자고 하는 것인데 회담의 기본정신을 망각해서야 되겠는가. 잘 협조해서 예비회담이 좋은 성과를 거두도록 하라』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김대사는『옳다. 이제야말로 두말하지 않겠지』하는 생각으로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와 회담을 계속했다.
그러나「오으노」차관의 태도는 여전히 강경했다. 김대사는 오산을 한 것이다. 이대통령 휘하의 한국관료들과는 판이한 행동양식을 가진 일본관료들을 생각지 못했다고나 할까.
그는 치받쳐 으르는 부아를 더이상 참지 못하고 걱정을 쏟아냈다.『당신네 수상은 한국의 대일청구권에 대해 사실상 인정하기로 나와 합의를 했소. 그런데 당신들 실무진이 말을 안 듣는다면 내가 더이상 여기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소. 이게 일본의 외교방식이오.』
김대사는 이 말을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오오노」차관등 일본측 대표들도 사태가 이쯤되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김대사에게 『그렇게 화를 내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고는 회의실 옆방으로 가서 구수회의를 했다.
한참 숙의한후 회의실로 나온「오오노」차관은 마침내「기시」수상의 방침에 따르겠다고 말해 예비회담은 일단 성공리에 마무리됐던 것이다. 이날의 회의는 상오10시에 시작해 밤9시30분에 끝난 마라톤회의였다.
김대사는 일시 귀국해 이날 회의를 설명하면서『골탕은 무진 먹었지만 일본관료들의 그런 태도는 정말 배울점이더라』고 거듭 강조했다.
제4차 한일회담 개회일을 9월2일로 합의하는등 모든 예비적 절차가 원만하게 합의됐는데도 이대통령의 재가가 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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