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없이 추대할만한 국회지도자가 있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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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벌써 오래된 얘기지만 국회의원들이 왕방울 만한 금빼지를 달고 다니기를 좋아했을 때 부터 나는 국회에 실망했었다. 「선량」이라는 말이 안겨주는 이미지와 금빛 찬란한 빼지가 풍기는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고 나의 상식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의사당이 지금의 여의도로 옮겨갔을 때에는 더 이상 국회에 기대를 걸지 않은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칠」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1943년 가을, 독일군의 공습으로 폭파된 하원의 재건이 논의되는 자리에서 당시 수상이던 「처칠」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예전 그대로 장방형의 비좁은 의사당을 복구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영국은 양당정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의장이 종전처럼 장방형이라면 마주 앉아있는 양당사이의 넓은 통로를 건너서 이쪽당에서 저쪽당으로 옮기는데 매우 신중을 기해야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곧 단순한 정실 등에 의한 이합집산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또 의장이 넓으면 대개의 토론은 텅 비거나 아니면 반밖에 차지 않은 장내에서 해야하며 연설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신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협소한 의장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습니다. 격식 바르고 거창한 웅변을 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토론은 회화적이며 부드럽게 전개됩니다. 이와 반대로 높은 연단에서라면 장광설이 아니면 과장된 제스처의 사자후에 오르게 되기 쉽고, 그러면 또 의회정치의 효과도 말살되게 마련입니다….』
「처칠」은 이어 우원형의 장려한 바이마르의회가「히틀러」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에 의하면 의장이 너무 크면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놀이를 일삼는 이론가들만을 등장시킨다는 것이었다. 결국 영국 하원은 「처칠」의 의견을 받아들여 예전대로 전체 의원의 절반정도밖에 앉을 자리가 없는, 그것도 책상도 없는 긴 벤치만의 의사당을 재건하기로 했다.
우리네 의정사를 돌이켜 볼 때 중앙청의 빈약한 임시의장에서 헌법토의를 거듭하던 재헌국회 때가 가장 권위있었던 것 같다. 6·25동란과 함께 대구·부산의 문화극장·무덕관 또는 시민회관별관 등으로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때가 훨씬 더 국회다웠던 것 같다.
옛 대한공론사와 해군본부에서 전세방살림을 꾸렸던 4·19직후 삼의환도 지금보다는 한결 국회다운 활기에 넘쳐 있었던 것같이 회상된다. 그 어느 장소나 지금의 의사당에 비긴다면 이룰데 없이 협소하고도 초라했다.
16일 문을 닫은 이번 국회를 채점해보면서 새삼스레 「처칠」의 주장이 되씹어지는 것이다.
한 의원이 이따금씩 장관석을 둘러보며 장황하게 열변을 토한다. 바로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의원이 거의 비슷한 논조, 비슷한 내용의 질의를 되풀이한다. 분명 그 의원은 먼저 의원의 연설은 개의하지 않았다. 의장이너무 넓은 탓이랄까. 장관은 또 장관대로 똑같은 답변을 앵무새처럼 두 번 세 번 되풀이한다.
그래도 개의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누구나가 들으라고 하는 말도 아니오, 신통한 답변을 꼭 듣겠다고 따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저 자기 발언내용이 의사록에 기록되는 것만으로 층분히 만족할 수 있는 모양이다.
어느 결론에 이르도록 서로가 토의를 거듭하고 대정부 질의가 어느 형태로든 꼭 정부정책에 반영되기를 바라고있는지 의문스러울때가 없지않다. 그런 토의와 협의가 이뤄지기에는 연단과 의원석,장 관석과 의원석사이에 너무나도 거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중요한 안건은 비공개리에 의장밖에서 처리된다. 이런 의장밖의 협상에는 기록이 따로 없다. 국회안에서 이뤄지는 일들이 모두 안개에 가려져 있는 듯이 여겨지는 것도 이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물리적인 거리감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국민이 한결같이 추앙 할만한 의회지도자가 없는 이유가 혹은 이런 때에도 있는 것 인지도 모른다. 곁으로는 뛰어난 호혜의 투사로 보이지만 그 속을 캐보면 어쩌면 엉뚱하게 달랐는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특히 근래에 이르러 강하게 품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비밀에 덮인 사실은 좀처럼 캐낼 수 없는 채로 과거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이 한국의 딱한 정치적 풍토다.
따라서 한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사후 20년이든 30년이든 크게 바꿔지지 않는다.
국회에서 동상건립대상후보의 범위로 사후 2O년을 거론한 것은 그만하면 그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정립되리라고 본 때문이다.
그러나 4·19나 5·16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조차 역사가들에게 맡기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풍토에서 정말로 객관적인 인물평가가 이뤄질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3선 개헌을 끝내 반대하다 물러난 정구영씨를 추대하려면 3선을 지지한 국회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규탄 받아야 한다.
한때는 반독재의 양사였다가 나중에「쌍절」하여 버린 사람의 평가를 어떻게 해야하는가하는 문제도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누구보다도 공헌이 많았다고 할 수 있는 이승만박사와 자신이 마련한 바로 그 기틀을 비틀어 놓은 이박사와를 따로 떼어서 평가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와도 관련되는 얘기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사람이 조금도 주저없이 추대할만한 지도자를 우리는 거의 아직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게 또 우리의 다시없는 불행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역사이자 현실이다. 굳이 국회안에 동상이 필요하다면 한가지 방법은 있다.
영국의 의사당에는「크롬웰」의 동상이 있다. 「찰즈」1세를 단두대위에 올리고 독재자가 된「크롬웰」은 의회를 제멋대로 주물러 나갔다. 1653년4월의 어느 날 그는 군인들을 이끌고 하원에 나타나서 『닥쳐라! 의원제군! 자네들은 자리를 뜨고 자네들보다 대범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넘겨라.
의장을 끌어내려라. 그 어린애 장난감 같은 작대기 (의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갈장)를 저리 치워버려라!』고 소리친 적도 있다.
이런 「크롬웰」의 동상까지 버젓이 진열하고 있는 것은 영국의회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영욕에 얽힌 사건들에 관련된 주역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따라서「크롬웰」의 동상을 보면서 사람들은「크롬웰」의 그 엄청난 군대의 힘으로도 꺾지 못한 의회의 자랑스런 전통을 생각하게 된다. 이를 본떠서 우리도 국회를 지킨 사람과 함께 국회를 약화시킨 인물들의 동상까지도 세우면 된다. 특히 언제 정말로 올바른 평가가 가능하게 될 지 모르는 때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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