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안된퇴직혁명] 중. 노사갈등 불씨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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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대기업의 '솔선수범'이 한몫했다. 도요타자동차가 2002년 7월 새 제도를 부분 도입했다. 히타치(日立)는 도입 전 직원 대상 설명회만 700여 회 열었다. 새 제도 시행 6개월 만에 40여 개의 대기업이 참여하더니 올 8월 말 DC형 가입 회사는 4800여 개, 156만 명으로 급속히 불어났다.

2005년 11월 한국. 퇴직연금 시행을 불과 보름 남짓 남겨놓았지만 노사 양측의 간극은 좀체 좁혀지지 않고 있다. 퇴직 연금 도입은 '노사 합의'란 관문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러나 재계-노동계 모두 어느 쪽이 자신들에게 유리한지 주판알만 튕길 뿐,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노조는 DB형을 밀어붙일 게 틀림없다. 하지만 기업들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몰락을 불러온 DB형의 폐해를 걱정한다."(황인철 경영자총협회 사회정책팀장)

"퇴직연금제도는 근로자의 유일한 노후대책인 퇴직금제의 대안이다. 그런데 노동자 개개인에 책임을 떠안기는 DC형이 정답이 될 수 있겠는가."(한국노동자총연맹 강익구 정책국장)

◆ 노사가 나쁜 점만 본다=재계와 노동계가 DB형.DC형 중 어떤 것을 도입할지를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펼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 산별노조 관계자는 "DC형 도입 이후 몇 년만 지나면 근로자마다 투자 행태에 따라 수익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며 "그렇게 되면 노조 조직을 뿌리부터 와해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는 재계대로 걱정이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DB형을 도입하면 임금피크제.연봉제 등 새 인사제도를 도입하거나 분사.사업조정을 할 때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사 양쪽 모두 눈치만 보며 미루거나 아예 도입 자체를 포기하려는 움직임도 나온다. 경총은 회원 기업들에 'DB형을 시행하느니 차라리 현행 퇴직금 제도를 유지하라'고 권하고 있다.

한국노총도 산하 노조에 '퇴직금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퇴직연금으로의 전환은 신중을 기하라'는 지침을 전달할 계획이다.

◆ 정보 부족에 의욕도 실종=노사가 퇴직연금 도입에 소극적인 것은 본지-피델리티 설문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퇴직연금 실무를 다룰 전담 인원이나 조직을 둔 곳은 기업의 58%(겸직 37% 포함), 노조는 27%에 불과했다. 노사 모두 현행 퇴직금 제도를 유지하겠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은 반면 퇴직연금 방식에 대한 선호는 극히 낮았다.

이는 정보와 교육 부족 탓이 크다. '퇴직연금이 언제 어떻게 도입되는지 제대로 안다'는 기업은 두 곳 중 한 곳(50%), 노조는 세 명 중 한 명(32%)꼴이었다. DB형.DC형의 차이를 모르겠다는 응답도 노사 모두 절반을 넘었다.

기협중앙회 관계자는 "중소기업은 퇴직충당금을 운영 자금으로 꺼내 쓰는 경우가 많다"며 "이에 대한 대책 없이 어떤 중소기업이 선뜻 나서겠나"고 말했다.

◆ 타협으로 상생의 길 찾아야=연세대 김진수(사회복지학) 교수는 "처음부터 'DB는 노동자에게 유리하고 DC는 불리하다'는 식의 대립 구도가 형성됐다"며 "실제 두 방식은 도입하는 기업의 업종.규모는 물론 급여.근무 형태 등에 따라 장단점이 갈리기 때문에 우열을 따지기 쉽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전문가들은 노총이나 경총 등 재계.노동계 대표단체가 퇴직연금 공동 기구를 설립, 운용하는 것을 해법의 하나로 제시했다. 상지대 김인재(법학) 교수는 "재계와 노동계가 퇴직연금 공동기구를 만들어 노총은 기금 안정성 문제를 감독하고 경총은 사용자 부담 문제를 따지는 역할을 맡는 등 종합적인 컨설팅과 감시 임무를 맡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퇴직연금을 둘러싼 노사 갈등 조정기구를 지원하고 중소기업 등 정보와 교육에서 소외된 근로자들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통신노조연맹 정무길 조직쟁의실장은 "가장 취약한 계층은 제대로 된 퇴직금 제도도 없고 고용은 불안한 데다 노조도 없는 중소기업 근로자들"이라며 "정부가 이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표재용.이승녕.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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