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프란체스카여사 비망록 33년안에 공개|외국 대사-장성들 나를 “청우계”라 불러 나와의 동석여부로 대통령기분 헤아려|신임 리지웨이 사령관도 분위기알고 즐겁게 담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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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2월26일.
워싱턴의 알링턴묘지에 묻히게 될 고「욀튼·워커」장군은 그가 죽기 전에 대장승진이 「맥아더」장군에 의해 내신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성모국방의 말에 의하면 사고당시「워커」장군의 지프는 미군 트럭이 아닌 우리6사단 소속의 드리쿼터와 충돌을 했으며 장군이 직접 차를 운전했었다고 한다.「워커」장군도 대통령처럼 항상 차를 과속으로 운전하는 버릇이 있었다.

<미 후퇴전술 진저리>
그리하여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통령이 직접 자동차의 핸들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롱령은 오늘 김백일장군의 사단을 시찰하기 위해 강릉으로 비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신국방장관이 새로 부임하는 미8군사령관「리지웨이」장군을 맞기 위해 대구로 가야했기 때문에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사진으로 보는「리지웨이」장군의 인상은 호감이 가지만 제발 후퇴하지 말고 공격해서 중공군을 몰아낼 수 있는 장군이었으면 좋겠다.
사실상 대통령은「워커」장군과 유엔군의 후퇴전술에 역정을 내고 있는 것이다.
전략이라고 해서 나왔다 들어 갔다하면 곤란과 고통을 받는 것은 우리국민들이라고 대통령은 불만이 크다.
작전상 후퇴라고는 하지만 미국사람들은 이 당이 자기나라가 아니니까 어떻게든 한국을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것 갈다고 대통령은 우려를 하고있다.
더우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연합군사령부의 참모들이 한국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킬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고 하니「리지웨이」장군이 어떤 복안을 가지고 부임해오는지 우리는 걱정이 된다.
나에겐「리지웨이」장군이 어딘지 다른데가 있을 듯한 느낌이 드는데 나와 반대로 대통령은 그 사람이나 이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별로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있다.
대통령은 서부전선의 임진강상류 38선지역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백선엽장군휘하 제1사단의 우리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표창장을 수여했다.

<리지웨이 결의 만족>
12월27일.
상오 11시50분「리지웨이」장군이「무초」대사와 함께 대통령을 뵈러왔다.「콜리어」대령과 신국방장관이 이자리에 함께 있었다.
대통령은 표정없이 담담한 태도로 처음에「리지웨이」장군을 맞이했다.
「리지웨이」장군은 좀 건강한 기색을 보였는데 이내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나서 『대통령각하, 저는 한국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주둔하려고 온 것입니다. 기어이 적을 박살내겠습니다』하고 군인답게 말했다.
「리지웨이」장군의 이 결의에 찬 말을 들은 대통령은 낯빛을 누구러뜨려 힘차게 장군의 손을 잡으면서 나를 소개했다. 그리고 제일 맛있는 차를 끓여오라고 대통령은 말했다. 장군은 차를 마시면서도 자기들은 한반도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8군은 태세를 재정비하는대로 공세를 재개할 결심이라는 것을 대통령에게 말했다.
대통령이 자기의 말에 만족해 하는 것을 보고「리지웨이」장군도 시종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필자주=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대통령이「리지웨이」장군에게 나를 소개하고 차를 가져오도록 한후 장군이 유난히 기뻐한 이유는 또 있었다. 미국의 장군들이나 여러나라 대사들은 나를 대통령의 마음을 관축하는 청우계라고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중앙 관상대에서 날씨를 미리 예보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대통령옆에 나타나는 날은 청명한 날씨로서 면담분위기나 결과도 좋다는 것이고 내가 안나타나는 날은 찬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뒤덮이며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라고 그 누군가가 새로 부임해오는 사람들에게 귀뜀해 주었기 때문에「리지웨이」장군은 나를 보면서부터 줄곧 기쁨을 감추지 못한것 같다)

<서울시민 남하도와>
시민들은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
누구든지 시골에 연고지가 있거나 또 어디든지 살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려고 남하하고 있었다.
우리는 교회로 차를 타고 가면서 이러한 가슴아픈 처량한 광경을 보았는데 그들의 앞길에 하느님의 은총과 가호가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빌었다.
정들었던 모든것을 뒤에 버려두고 오직 가지고 갈수 있는 것이라고는 담요나 포대기밖에 없었다.
어디서든 추위를 막고 지내려면 덮고 잘 것이 제일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께 감사할 일은 전쟁이 발발했던 지난 6월에 비해 좀더 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정부는 시민들이 불편을 참으면서도 다소나마 기차와 배편을 이용하여 피난할 수 있도록 했으며 곳곳에 구호소를 설치하여 피난민들을 돕도록 하고있었다.
우리는 전공무원들에게 두달치 월급을 한꺼번에 내주고 피난을 가게했고 경무대의 직원들과 고용인들도 두달분 윌급을 받았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시골에 친척이 있어 다행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연고자도 없이 대구와 부산으로 정처없이 내려가고 있다.

<피난행열보고 눈물>
부산과 대구에 가도 무엇을 해야하며 어떻게 생계를 꾸려야할지 막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산에서는 조그마한 방 하나를 얻는데도 월세가 한달에 10만원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고 하니 모두가 그런 형편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참으로 큰 걱정이다.
어른들의 이 담담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강의 얼음위에서는 철없는 동네 어린이들이 즐거운 듯 팽이를 돌리며 놀고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강부교 부근에서는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는 피난민의 대열이 처참했다. 그 피난민의 대열을 바라다보는 대통령은 침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듯 한참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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