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민 눈높이에 맞는 복지가 정답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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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일반 국민들과 전문가들이 바라는 한국형 복지의 그림이 나왔다. 본지가 지난 12~13일 전국 성인 남녀 1000명과 복지 전문가 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다. 최근 정치권의 증세와 복지 구조조정 논란이 혼란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주목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재원은 한정돼 있는데 여기저기서 돈을 더 내놓으라고 아우성친다.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곳곳에 싱크홀이 생기고 있다. 한정된 자원을 어디부터 쓸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급선무다.

 이번 조사에서 국민과 전문가 모두 1순위 지원 대상으로 사각지대에 방치된 빈곤층을, 2순위로 영·유아 보육을 꼽았다. 기초연금이나 초·중·고생 급식은 한참 뒤로 밀렸다. 또 우선적으로 추진할 복지 사업으로는 국민은 1·2순위로 출산율 제고와 빈곤 축소를, 전문가는 빈곤 축소와 출산율 제고를 들었다. 이를 종합하면 최우선 지원 대상은 송파 세 모녀와 같은 빈곤층이고, 집중 투자할 복지 사업은 출산율 제고다.

 그동안 빈곤층 복지는 무상복지에 밀려왔다. 기초수급자는 2009년 157만 명을 정점으로 올 1월 사상 최저인 133만 명으로 줄었다. 차상위 계층이 415만 명에 이르고 이 중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수급자보다 못한 삶을 사는 비수급 빈곤층이 117만 명에 달한다. 송파 세 모녀보다 못하거나 비슷한 가정들이다. 10년 사이 복지 예산은 2.2배로 늘었지만 빈곤층 지원은 그만큼 늘지 않았다. 올해 복지 예산 116조원 중 빈곤층(기초수급자 포함)에 쓰이는 돈은 20조원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와중에 제2, 제3의 송파 세 모녀가 줄을 이었다. 지난 7일 폐결핵을 앓던 서울 용산의 80세 할아버지가 숨진 채 발견됐다. 정부 지원금 50만원 중 30만원을 치료제(알부민) 약값으로 썼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움직이기 힘들어 새벽마다 사회복지사에게 “와서 컵라면에 물을 부어달라”고 전화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통장 잔고는 27원이었다.

 국민과 전문가는 나라의 장래를 위해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2014년 1.19명)을 걱정하고 여기에 복지 예산을 우선적으로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상보육이 아니라 국공립 어린이집 확대, 우수 교사 확보 등의 보육의 질 향상을 기대한다.

 복지가 국민 눈높이에서 멀어진 이유는 사회적 논의를 거쳐 차근차근 늘린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득표 도구로 오·남용했기 때문이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무상복지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런데 정치권은 반성은커녕 증세가 먼저니, 복지 구조조정이 먼저니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이마저도 내년 4월 총선을 염두에 둔 선거용 사탕발림처럼 보인다.

 이제는 정말 냉정해져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복지, 전문가가 생각하는 복지가 뭔지가 명확해졌다. 본지 조사에서 국민은 선택과 집중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상급식을 최우선적으로 축소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다음 축소 대상은 무상보육과 기초연금이다. 국민은 소득 상위 30%를, 전문가는 50%를 제외하자고 제안한다. 이를 시행한다면 3대 무상복지에서 7조~12조원가량을 절감할 수 있다. 이 돈을 빈곤 해소와 출산율 제고로 돌려야 한다.

 저출산·고령화 추세를 감안하면 복지 축소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국민이 원하는 중부담-중복지 국가로 가려면 지금보다 복지 투자를 크게 늘려야 한다. 국민들은 증세는 탐탁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55.5%가 복지 확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전문가는 증세를 선호하고 91.7%가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증세가 쉬운 문제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올해 경제가 지난해보다 나아질 가능성이 작고 2012~2014년에 이어 올해도 세수에 구멍이 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증세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 때문에 논의조차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

 서구의 복지국가는 100년 역사를 자랑한다. 한국 복지 투자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25년 정도밖에 안 됐다. 갈 길이 멀다. 정치권은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용기가 필요하다. 전문가·노동계·재계·시민단체 등 사회 구성원들과 범국민 협의체를 구성해 복지 구조조정과 증세를 포함한 재원 조달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