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한일회담(53)유진오-1차 회담 결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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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청구권 문제야말로 한일 양국이 과거 36년간을 땅에 묻고 국교 정상화의 새 출발을 하는 데 있어 필연적으로 넘어야 할 최대의 장벽이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대일 청구권은 36년간의 일제 식민 통치와 거기서 비롯된 일본의 수탈 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청산 요구였다.
앞서의 협정 요강에서 표현한 대로 우리측은 식민통치의 압박과 질곡에 대한 정신적 보상이나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항해 싸운 교전국으로서의 전쟁 배상은 전혀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처음부터 일본인들이 가져간 우리의 재산, 우리의 소유물에 대해서만 반환을 요구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일본측에 강제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에서 「덜레스」미국 대표가 밝혔듯이 한국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일이 없고, 또 평화조약의 조인국으로도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배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일청구권은 시초부터 영토의 분리 내지 독립에서 비롯한 재정적·민사적 채권 채무의 청산성격만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측은 우리의 명백하고도 순수한 요구를 감추어 두었던 「억지」를 발동해 외면하려 한 것이다.
일본의 이 같은 억지 주장으로 결국 1차 회담은 결렬되었고 나를 포함한 대표단은 본국의 훈령에 따라 분노와 착잡함이 얽힌 심경으로 체일 6개월만에 총총히 귀국하고 말았다.
그 후 이 문제는 미국 정부가 외교각서로 「일본의 대한청구권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림으로써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게 되지만 이는 1차 회담이 결렬되고도 수년이 흐른 57년의 일이다.
1차 회담이 결렬된 지 1년 후 양국은 다시 회담을 열기에 이르지만 나는 봉직하던 고려대학교 일등으로 한동안 한일회담에 관여할 수 없었다.
내가 다시 한일회담에 대표로 나가게 된 것은 그 후로도 수년이 더 흘러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때의 일이다.
때문에 내가 관계하지 않은 2, 3, 4차 회담에 얽힌 이야기들은 따로 그 내용을 잘 아는 분이 맡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돼 나의 회고는 여기서 일단 끝을 맺을까 한다.
후에 다시 건강과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내가 관계했던 한일회담의 남은 부분에 관한 얘기를 보충해 볼까 하는 생각이다.
6개월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도 할 수 있을 체일기간 동안 나는 회담 틈틈이 동료 대표들과 어울려 도오꾜의 밤거리를 섭렵하기도 했고 한 두번은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그때 나와 함께 주로 어울렸던 분은 홍진기·지철근 대표 등이었다. 세 사람이 모두 나이 차는 조금씩 있었지만 한참 활동할 시절들이었으니 화제는 자연히 동서고금을 섭렵하기도 하고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기도 하는가 하면 때로는 객기도 조금씩은 튀어나오곤 했던 것이다.
이런 얘기들은 나중에 다시 기회가 있는대로 소개하기로 하고 이제 내 이야기를 끝내면서 한두 가지 머리에 떠오르는 상념들을 결론 삼아 남겨 두고자 한다.
생각해보면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옛 속담은 적어도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 얘기인성 싶다. 국경을 접한 나라 치고 이웃사촌이라고 오순도순 지내는 나라가 드문 것이 국제 관계가 아닌가 느껴진다.
딱히 한일간의 관계를 들추지 않더라도 중·소 관계가 그렇고 중공과 인도, 인도와 파키스탄, 미국과 멕시코, 그리고 과거의 영·독·불 관계가 대개 그러하다.
한일 관계를 가리켜 양국의 지도급 인사들이 「일의대수의 관계」라는 수사를 자주 사용하지만 그보다 원래 한일 관계란 「가깝지만 먼 이웃」정도로 정의해 두는 것이 보다 이성적 태도가 아닌가 싶다.
다만 우리가 지향해야 될 것은 그런 「가깝고도 먼 사이」를 굳이 적대 관계로까지 악화시키는 소아를 버리는 일이다.
최소한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지키지 않으면 안될 수칙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상호 존중의 자세」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호 존중의 자세는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우월감·경멸감·반감들을 모두 거둬들이는 것이니, 이것이 이루어지면 양 국민들은 서로의 좋은 점을 알 수도 있게 되는 것이며 서로를 이해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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