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초같은 백진 속의 흑 두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5면

제37기 왕위전 본선리그 제8국
[제5보 (74~95)]
白·安祚永 7단| 黑·趙漢乘 6단

패의 크기나 비중에 비해 백74의 붙임수는 너무 소박했는지 모른다. 사실 우상귀 A의 붙임 등 좀더 강퍅한 수를 찾으려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안조영7단의 바둑은 시종 부드럽고 잔잔하게 흘러간다.

"형세가 좋아서일 것"이라고 임선근9단은 말한다. 74로 만족한 것은 분명 형세에 대한 여유 탓일 것이다.

혹은 천성일지 모른다. 젊고 재주있는 사람들은 대개 빠르고 날카롭다. 느리고 무딘 것은 재능 없음의 표시다. 그런데 아주 가끔 그 반대도 나타난다. 이창호9단이 그 대표적인 사례고 안조영7단 역시 그 범주에 든다. 조한승6단은 75로 이어 얼른 패를 해소했다. 76으로 귀의 임자가 바뀌었지만 77로 임시변통하는 수단도 있어 흑은 크게 한숨돌린 기분이다 (백B로 두어 살아가는 맛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바둑은 아직 첩첩산중이다. 흑집은 전체적으로 약 55집. 포석 때부터 철저히 실리로 나갔으나 생각보다 별로 짓지 못했다. 백집은 흑79로 한쪽 귀를 뜯겼는데도 짱짱한 45집. 후수를 밥먹듯이 감수하며 느리게 움직였으나 덤을 고려하면 집 차이가 3, 4집에 불과하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의 경주를 보는 듯하다.

문제는 중앙이다. 백은 중앙의 두터움이 넓게 펼쳐져 있어 발전 가능성이 무궁하다.

백80도 安7단다운 조심스러운 한수. 흑엔 '참고도1'처럼 움직이는 뒷맛이 있다. 당장은 안되지만 상황이 바뀌면 바로 수가 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80과 81을 교환해두면 '참고도2'처럼 백2로 응수하는 수가 있어 두번 다시 염려할 게 없다.

89까지 귀를 살아둔 趙6단은 이번엔 91로 날아든다. 동분서주하건만 오늘 바둑은 아직 풀릴 기미가 없다.

95로 두칸 뛰었으나 흑은 아득한 사막길의 정처없는 나그네 신세. 조훈현에 버금가는 예술적인 행마 감각에다 두터운 기풍을 자랑하는 趙6단이 오늘은 '엷음'에 시달리고 있다. 흑 두점의 행방은 과연 어찌되는 것일까.

박치문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