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소쩍새야 소쩍새야/ 솥이 작아 밥을 많이 지을 수 없다지만/ 올해엔 쌀이 귀해 끼니 걱정 괴로우니/ 솥 작은 건 걱정 없고 곡식 없어 근심일세'.

조선 중기 문인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한시 '정소(鼎小.소쩍새.솥이 작다의 '솥적'에서 비롯된 표현)'의 일부다. 한자의 음훈(音訓)으로 날짐승을 나타내는, 금언체(禽言體)의 이 시는 흉년을 맞은 농민의 처지를 잘 그리고 있다. 철없는 소쩍새는 솥이 작다고 푸념하지만 농민의 사정은 뒤주를 박박 긁어도 쌀 한 톨 찾기 어려울 정도로 딱하기 짝이 없다.

그런 그에겐 피죽조차 귀한 음식이다. '쌀 적고 물 많아 죽이 잘 익질 않네/…피죽도 넉넉지 않은 만큼 부디 싫다 마소'. 장유는 '직죽(稷粥.피죽새)'이란 시에서 피죽새처럼 '후루룩' 소리를 내며 죽을 먹을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노래했다.

우리 조상은 이런 시절을 견뎌냈다. 그들에게 쌀은 피와 살이었다. 신앙이었다. 그들은 쌀에 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신주단지에 쌀을 넣고 안방이나 대청에 모셔 놓았다. 단지를 매년 햅쌀로 채우고, 있던 쌀로는 밥을 짓되 식구끼리만 먹은 건 그 안에 신의 복(福)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정초에 쌀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이나, 산모의 해산을 앞두고 정(淨)한 쌀로 산미(産米)를 준비했던 것 역시 쌀과 신과 복을 하나로 본 데서 비롯된 풍습이다. 송나라 손목(孫穆)이 "고려에선 쌀을 보살이라 한다"('계림유사')고 한 건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쌀이 살이고, 신이었기에 그에 대한 조상의 애착은 대단했다. 오죽하면 '만석꾼네 고방(곳간) 쌀보다 내 쌀 한 되가 낫다'거나, '쌀독과 마음속은 남에게 보이지 말라'는 등의 말이 생겼겠는가.

그런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농민에게 지금 큰 시련이 닥쳤다. 쌀시장을 더 개방하는 내용의 '쌀 비준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운명에 놓였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비준안을 저지한다고 해서 그들의 처지가 나아지는 건 아니다.

이럴 때 조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피죽으로 흉년을 이겨낸 끈기, 남의 고방 쌀보다 내 쌀 한 되를 더 중히 여기는 자긍심으로 역경을 극복하려 하지 않았을까. 값싼 수입쌀과 경쟁하려면 정부 지원도 필요하지만 농민의 단단한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이상일 국제뉴스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