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사건후의 북방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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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한항공여객기 격추사건은 미소관계를 포함한 동서관계를 전반적으로 긴장시켜 놓고 있다. 그중에는 한국과 소련관계가 포함되는것은 말할것도 없다.
국민감정대로 한다면 한국은 소련과 일체의 비공식 접촉과 스포츠를 비롯한 문학관계 인사들의 교류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싶다.
유엔안보리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서의 소련의 사리에 닿지도 않는 주장은 우리의 상처에 매질을 하는 골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소관계라는 표현조차도 의미가 없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안보정세와 경제 여건은 감정을 하루속히 이성으로 다스리면서 지금부터 북방정책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게 만든다.
소련으로부터 피해보상과 사죄를 받는 일은 유엔총회, 국제민항기구총회, 그리고 세계여론의 광장에서 차근 차근 추진할수 밖에 없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취할만한 조치는 별로 없는 현실 때문이다.
이번 사건으로 최악의 지경에 빠진 한소관계를 일단 원상복구하고, 소련의 반응여하에 따라서는 소련의 고경을 활용하여 두나라간의 접촉을 확대하는 길을 모색하는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한국과 소련은 학술과 스포츠·문학 같은 비정치적인 교류의 실적을 착실히 쌓아 온 셈이다. 그것이 여객기사건으로 한꺼번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어도 국가는 존속하고, 우리의 장기적인 외교목표는 추구되어야한다. 우리가 말하는 장기적 외교목표의 하나가 소련파의 관계를 개선하여 그들로 하여금 북한의 등을 남북대화의 테이블로 떠밀고, 북한의 군사모험을 견제하고, 궁극적으로는 남북한교차승인의 성사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약소국가이기 때문에 소련에 당했다는 자조적인 비탄에 젖어 감성론으로만 내달리기에는 한반도 주변의 정세가 너무 냉엄하다. 이번 사건처리 과정을 보아도 미국·일본·서구의 우방들이 저마다 국익을 챙기는 선에서 소련규탄과 제재의 강도를 조절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다가 미국과 소련은 중동의 산유지대와 인도양의 해상수송로, 그리고 동북아시아를 잇는 거시적인 군사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이지역의 군사적인 긴장은 당분간 고조가 계속될것으로 보아야한다.
한국이 미국의 안보우산 밑에서 불안한 무장평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우리가 자주적으로 북방의 두 공산대국들과 관계를 개선하여 군사적인 대응태세를 외교적으로 보완하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주체적으로 주도할 필요성은 이지역의 긴장고조와 정비례한다고 하겠다.
소련도 한반도의 전략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그래서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내심으로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게 사실이다.
소련이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반경1천마일 안에 10억의 인구가 살고, 동북아시아 산업의 80%가 집중되어 있고, 이지역 군사력의 75%가 배치되어 있는 사실을 무시하고는 아시아전략과 정책을 수행할수가 없는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한국 못지않게 소련도 한소관계를 개선해 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오고 그러는 과정에서 북한의 투정도 많이 받았다.
그런 공을 미사일로 무너뜨린것이 소련이다. 그러나 소련의 흉탄이 한국의 중요성과 한반도의 가치까지 「격추」시킨것이 아닌 이상 한소관계의 원상회복을 위해서라도 소련은 여객기 격추사건 수습에 성의를 보여야 할것이다.
우리는 소련에 압력을 넣기 위해서 세계여론을 동원하는 일에 목소리를 합치면서도, 동시에 「KAL이후」의 북방정책을 생각하는 또 한갈래의 관심과 이성을 활성화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겪은 바로는 가장 가까운 우방들도 한소, 한·중공관계의 확대노력에는 지원보다는 경계의 태도를 취하는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잊지말아야 할것이다. 문제는 소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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