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네모 세상] 자작나무 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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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거리는 미풍에도 제 몸 못 가누고 파르르 떨리는 자작나무 잎을 본 적 있나요. 햇살이라도 받은 날이면 온몸으로 붉은빛을 토하며 반짝입니다. 희디흰 껍질은 아침 햇살엔 붉은빛으로 물들고 오후 햇살엔 은색으로 반짝이다가 저녁 햇살엔 황혼빛으로 타오릅니다. 달빛 은은한 날이면 짙은 청색의 수채화를 그리기도 하지요. 이래서 자작나무 숲을 '숲의 여왕'이라고 하나 봅니다.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자작나무 숲에 찾아들었습니다. 옛 영동고속국도 대관령 구간, 수백 번쯤 지나쳤을 그 길섶에 자작나무 숲이 함초롬히 젖어 있습니다. 쏜살같이 달리느라 지나쳤을까요. 아니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 못 본 탓일까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뜨이나 봅니다.

자작나무는 껍질을 태울 때 나는 '자작자작' 소리에서 이름을 얻었답니다. 여러 겹의 얇은 껍질은 종이를 대신해 연인들의 연서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도 자작나무 껍질일 뿐만 아니라 신라금관의 잎 모양 장식 또한 자작나무의 잎이라고도 합니다.

자작나무 숲이 가을비에 젖던 날 밤, 대관령엔 첫눈이 내렸습니다. 머지않아 몇 남지 않은 잎마저 털어 내고, 순백의 설원에 눈꽃으로 서 있을 것입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아련한 장면처럼 지워지지 않을 또 하나의 풍경이 뇌리에 박혔습니다.

빛을 반사하는 흰 껍질과 누런 잎은 천차만별의 숲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오래 지켜보면서 빛의 변화를 사진으로 담다 보면 사진이 빛의 예술임을 절로 깨닫게 됩니다.

권혁재

< HASSELBLAD X-pan 45mm F22 1/2초 Iso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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