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등 공감가나 새로운 감동은 못줘|『회춘』…생각의 깊이와 기교 만만찮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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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결 짙어진 그늘과 고개를 든 바람기에 밀려 그 등등하던 기세를 꺾고 자취만 뚜렷이 남긴채 늦더위 몇점을 보듬고는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고있는 여름, 지레 먼기러기 소식이라도 들려올것만 같은 가을의 문턱에 다다라있는 이즈막의 처서무렵.
이것은 이번 회에 선보이는 두염의 절기 시조(『처서』)와, 그 절기의 감각으로 다스린 두적의 시조(『미류나무 아래서』』『잔서』)에서 핵심만을 골라 선자 나름으로 엮어본 작문이다. 이만하면 처서무렵의 계절적 상황이 웬만큼은 잘 드러났다고 헤아려진다. 바꾸어 말해 4편의 시조들은 각기 처서 무렵의 계절감각을 어느정도 적실하게 노래했다는 풀이가 된다.
그런데 그 작품들을 통해 선뜻 느껴지는 것은 하나같이 낯익은 목소리라는 점이다. 따라서 읽는이에게 편안한 공감을 줄지언정 어떤 새로움의 감동을 자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 「낯익은 목소리」란 무엇인가. 이른바「관념」(관염)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익히 배어있는 느낌과 앎(지각)의 세계, 그러기에 언제나 선입감으로 작용하게 마련인 그것.
가령, 위의 시조들 중에서 그 구절(부분)들만 보더라도, 그러한 관념은 이내 잡혀든다. 「짙은 그늘」은 두편에서, 「바람」은 세편에서, 또한 「열매」(과일)는 대개 비유로 씌어지긴 했지만 세편에서 공통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떠나는 여름」의 이미지는 네편 모두에 똑같이 나타나있다.
이런 점이 반드시 그릇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워낙 소재가 소재인 만큼 그러한 동질성은 어느 면으로는 당연한 귀결이기도하다. 다만 애써 관념을 벗음으로써 어느 한 대목에서나마 「자기만의 새로운 소리」를 찾으라는 뜻에서 그점을 일깨워두는 터이다.
특히 계절감각에 뿌리내린 시편일수록 관념의 함정에 빠지는 예가 잦기 때문인 것이다.
『회춘』은 연치를 느끼게하는 차분한 작품이다. 만일 간접 체험을 노래한 경우라면(그런 심증이 짙다) 그 생각의 깊이와 시조를 매만지는 솜씨가 더욱 만만찮음을 엿보게 한다. 종장의 득의에서 십분 두드러지는 것이다.
이번에 싣지는 못했지만『새재를 넘으며』는 은유의 효과를 적절하게 살린 작품. 역시 원만한 종장처리에 힘있어 전수가 생채를 띤다. 중장의「발등」에다 토씨「을」을 곁들여두었다. 토씨 하나가 전체의 가락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한차례 가늠해 볼일이다. <박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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