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성<국립현대박물관장>|법학 공부하다 미술학도 만나고 길 바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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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사람의 운명이란 자기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느힘에 이끌려서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운명이라 한다. 내가 법률공부를 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와세다대학 법과에서 법률을 전공하였는데 결국은 당초의 목적이었던 고등문관시험을 포기하고 와세다대학 문학부로 가서 미학 미술사를 전공하게 된것은 역시 운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운명속에는 방향을 바꿔놓은 내재적인 의지가 있어 그러한 결과가 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이, 즉 법률을 공부한다는 일 자체가 나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부모의 생각이요, 당시의 출세하고 싶은 의지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사실은 문과로가서 문학을 전공하고 싶은것을 부모의 희망에 따라서 법과를 선택하고 그렇게 타율적으로 선택된 길을 걷다보니까 그속에서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만족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자신도 장차 법관으로서 행세하고자 마음의 준비가 되어갔던 것이다.
그러할 무렵 같은 인천에서 자란 이남수라는 미술학교 학생을 만나게 되고 어쩌다 그와같이 아파트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미술학도인 이남수와의 만남이 나의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교양으로서 미술을 이해한다고 전람회나 화집을 뒤적거리던것이 점점 마음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서 제법 미술에 대한 일가견이 생기고 그 감미로운 감상의 세계에까지 도달하게된 것이다.
그리하여 졸업직후 고등문관시험을 포기하고 미술사나 미학을 공부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이다.
문학부에서는 미술사와 미학을 전공해서 그야말로 자기 하고싶은 것을 마음껏 했다.
1945년이후 인천시립박물관장, 이대조교수, 그리고 홍대교수등을 역임하면서 줄곧 한국근대미술사와 미술평론에 종사하여 왔다.
문득 생각하기를 만약에 갈림길에서 미술의 길을 택하지 않고 그대로 법률의 길로 갔다면 오늘과 같은 풍요롭고 의미있는 인생은 없었으리라 생각하면 운명적인 작용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 속에서 느끼고 받아들여서 사는 지금의 새활이 그지없이 행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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