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의미|조노하는 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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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회사를 그만 둔후 집에는 알리지 않은채 보름정도 출퇴근시간을 지켜 집을 나오고 들어가곳 했습니다. 그러나 보름 정도다니니 더이상 다닐 곳도없고 나혼자서는 도저히 대책도 서지않아 아내에게 이야기하기로 결심했어요. 정년으로 직장을 그만 두면 어떤 일을해야하나에 대해 평소 생각해 본적은 있으나 이렇게 1년을 앞두고 회사사정으로 직장을 그만 두게 되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또 나의 정년퇴직이 동갑나기 아내, 대학 다니는 마지막 두 자녀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는가를 생각하면 아찔할 뿐입니다.』
55세 정년을 1년 앞두고 실직한 어느 가장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현대를 흔히 고령화 사회라고 부른다.
1944년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42세를 넘지 못했으나 지금은 평균 66·5세.
그러나 평균수명의 신장과는 달리 산업사회이전에 비해 오늘은 일없이 놀아야 하는 중노년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영농사회에서라면 어지간한 노인이라도 생산활동에 관여할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산업사회에서는 많은 수의 샐러리맨들이 정년퇴직한 후면 일거리를 잃고 만다.
정년은 직종에 따라 다르나 노무직이라면 평균50세. 일반직이나 관리직이 55세, 경영진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60세까지다.
평균수평 66·5세를 두고 따지면 이들은 최소한 직장용 나온후 10∼15년은 할일 없는 상황속에 있어야 한다.
노인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고 박재간씨(한국노인문제연구소장)는 지적한다.
인간의 라이프 사이클로 보면 50∼60세까지가 가정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시기로 꼽힌다.
자녀들이 대학용 다니거나 결혼하거나 분가를 해주어야 하는 등의 일이 이때에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55세 정년이라면 가장은 실업 상태에 들어가고 소비만 크게 늘어나게 되어 가정은 파탄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박소장은 말한다.
선진국에서 정년을65침세로 올린 이유는 이같은 인생주기에서 가정을 보호해야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60세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노인문제를 상담하고 있는 가정법률상담소의 상담창구에서도 정년 이후 가정파탄을 호소하는 경우가 눈에 뜨인다.
50%이상의 노인이 직장을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 일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실감케 해 준다.
『나야 벌수 있는 데까지 벌어 가정살림이며 자녀들 교육에 다 쏟아 넣었지요. 그러나 정년퇴직을 하고 보니 밖에서도 집안에서도 내가 할 일이라곤 없었어요. 식구들에게도 따돌림이나 괄시를 받는 것같아 자연히 술을 입에 대게 되었고 가끔씩 화풀이도 했습니다. 이젠 자식도 아내도 받아들이지않으려는 외토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급기야는 60이 넘은 나이에 아내가 이혼까지 하자고 대드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읍니까.』
60을 갓 넘긴 할아버지가 상담소를 찾아와 호소하는 말이다.
바로 이같은 이유때문에 노경에 접어들어 이혼을 당할 위기에 있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노인상담을 맡은 주미대씨는 앝려준다.
노인문제상담소의 상담내용가운데 취업을 원하는것 다음이 부양문제이며, 그다음 부부의 이혼문제가 꼽히고있는데, 이혼의 원인중 하나가 일없이 놀고말썽만 부리는 조노의 할아버지다.
대부분 50대 중반부터 일정한 직업이 없게 된 노년층에 이같은 문제가 많다.
『비록 일정한 직업이 없더라도 집안이나 사회에서 쓰임새 있는 일을 찾아하는 사람이라면 말썽을 일으킬리 없지요. 그러나정년이 되고 자포자기하는 사람이라면 집안식구만을 들볶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주씨의 의견이다.
이처럼 사회에서나 가정에서조차 역할이 없어지는 50대 후반부터의 가장은 빠른 조노현상을 보인다.
육체적인 조노도 문제이긴 하지만 정신적인 조노가 더 심각하다.
또 현대의 핵가족화 현상은 부모의 부양을 외면하고 있다.
노인문제상담소의 두번째 순위가 부양이고 보면 이를 짐작할수 있다.
60세이상의 노인들은 양로원도 그다지 많지않아 70%가 시집·장가간 자식들 집에서 살고 있는데 여기서고부문제나 시아버지와 며느리간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외국의 경우 노인들에대한 생계비가 국가에서 지급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끼치지 않으므로 좋아하는 가족끼리 살 수도 있다.
비록 함께 살지 않더라도 가까운 거리에 살며 부모·자식간에 하루 한번정도 얼굴을 맞댈 수 있어도 노년층의 소외는 그만큼 감소된다.
박소장은 지금의 30대·40대가 노년층이 되는 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연금제도가 지금 곧 시행된다 해도 그 실효는 20∼25년이 지나야 수혜자가 나타난다.
2천년대를 전후하여 등장할 심각한 노인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화적부담이 있더라도 정년을 연장하고 지금이라도 곧 연금제도를 실시해야한다는 것이 박소장의 의견.
우리가 곧바로 해결할수 있는 방안으로는 중·노년층 스스로가 가정안에서나 지역사회에서 일거리를 찾아내거나, 봉사활동 등으로 삶의 보람을 찾도록 하는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금징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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