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이영숙씨 오누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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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6·25가 남긴 비극치고는 너무 처절합니다. 이럴수가 있읍니까….』
평북박천이 고향인 이영숙씨(38·서울신길3동325의3)는 10일하오 KBS앞 평배도민회 임시사무실에서 20년전 전사통지서를 받아 죽은줄로만 알았던 큰오빠 이낙기씨(52·서울중화동306의16)를 만나 꿈이 아닌지를 확인해보려고 자신의 얼굴을 꾜집으며 오열했다.
이씨는 1·4후퇴때 헤어진 어머니와 둘째·세째오빠를 찾으려는 신청서를 접수시켰다가 뜻밖에 나타난 큰오빠를 만난것이다.
11일하오 영숙씨집에서 역시 32년만에 첫 대면하는 매제 김현조씨(38)와 조카들에 둘러싸여 동생이 차린 음식을 드는 낙기씨는 파란만장했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모두 4남1녀였던 영숙씨 가족은 아버지 이종칙씨(77)가 측량이 어려울정도로 넓은 땅을 갖고있어 유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6·25가 터지고 1·4후퇴가 시작되자 이씨가족도 피난대열에 끼어 평양근처 능라도까지 오게됐다.
『폭격이 심해 어머니와 남동생 3명을 먼저 강을 건너보낸게 생이별이 되었죠.』
낙기씨는 아버지와 여동생 영숙씨와 일행이되어 강을 건넌뒤 어머니일행과 만나기로 했던 평양근처 삼촌집에 갔으나 가족들은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삼촌집이 폭격을 맞아 어머니일행이 다시 가족을 찾으러 강변으로 나가는 바람에 길이 어긋나게 된것이다.
낙기씨는 어머니·동생둘과 헤어진채 아버지·여동생 영숙씨와 함께 천신만고끝에 서울대방동까지 내려왔다.
그때 21살이었던 낙기씨는 『국군이 북진하면 혹시 고향에 갈수있을지도 모른다』며 군에 입대, 아버지·여동생과 또다시 헤어졌다.
낙기씨는 1사단15연대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하다 53년 연천지구전투에서 가슴에 파견을 맞아 입원치료를 받다가 휴전과함께 제대했다.
제대후 낙기씨는 노무자·광산주재원등으로 갖은 고생을하다 20년전 장안약품에 입사,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아들을 군에 보낸 아버지이씨는 딸 영숙씨와 함께 경기도평택으로 내려가 산밑에 움막집을 짓고 소작농과 품팔이로 근근이 살아왔다.
거의 구걸하다시피 끼니를 때우던 이씨가족은 60년3월 군에 입대했던 낙기씨가 ○○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청천벽력같은 이 소식에 이씨 부녀는 거의 실성할 정도였었다.
낙기씨는 생활이 안정되면서 신문사나 방송국, 평북도민회를 찾아다니며 아버지와 여동생소식을 수소문해오다 10년전부터는 아버지 생일날에 제사를 지내왔다.
「이산가족찾기」 방송에 신청서를 접수시키고 차례를 기다리던 낙기씨는 10일하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평북도민회 임시사무실에도 가족찾기신청서를 접수시켰다.
영숙씨도 평북도민회에 같은 내용의 신청서를 냈으나 전사통지를 받았던 오빠 낙기씨의 이름은 빠진채였다.
평북도민회 접수직원은 낙기씨와 영숙씨가 찾는 가족들의 이름이 같은것을 보고 KBS주위를 뒤진끝에 벽보앞에서 서성이던 낙기씨를 찾아내 남매상봉을 이뤘다.
영숙씨는 죽은줄만 알았던 큰오빠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핏줄임을 확인.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낙기씨는 곧 아버지가 살고있는 평택으로 내려가 32년만에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 이씨는 『죽은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오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며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영숙씨 남매는 아직도 생사조차 모르는 어머니와 낙홍(50)·창호(43)·창동(36)씨 이야기를 나누며 이산의 슬픔을 되씹었다. <안희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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