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이 보는 '고건 영입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수욕정(樹欲靜)이나 풍부지(風不止)다."

14일 오전 초고층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구룡반도의 끝자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홍콩섬의 한 식당. 고건 전 총리는 각 당의 '고건 영입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나무', 정치권의 영입 제의를 '바람'에 비유한 셈이다. 그는"나무는 고요하길 원하나 바람이 그냥 두지 않는다"고 뜻까지 붙이며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는 홍콩 앞바다를 분주히 오가는 화물선들을 가리키며 "지금 우리가 경쟁해야 할 상대는 거기(정치권)가 아니라 생존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세계의 국가들"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기 나와 있으니까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수행 중인 한 측근도 영입 논쟁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민주당과 심대평 충남지사를 중심으로 한 중부권 신당 추진 세력은 이미 오래전에 그의 영입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최근에는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장이 "경선을 각오하고 들어온다면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도 고 전 총리와의 제휴를 검토하고 있다.

고 전 총리가 각 당의 추파에 냉담한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지금의 영입론은 내년의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조치라는 성격이 강하다. 고 전 총리 입장에선 이용만 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할 수 있다. 당장 특정 정당의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할 경우 성적 부담과 함께 상대 정당의 집중 공격을 받는 것이 어려움이다.

이미지 관리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다. 그의 또 다른 측근은 여야의 예비 주자군을 거론하며 "(고 전 총리는)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의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라고 전했다. '여러 주자 가운데 한 명'이 되는 것을 피하고 '다른 주자들과는 차별화된 고건'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가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이 측근은 "입당 방식은 지분 다툼이 따를 가능성이 큰 데다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빚이 있어 하고 싶은 대로 못한다"고도 했다. 결국 고 전 총리는 입적을 통한 양자(養子)보다는 오너의 꿈을 꾸는 것 같다.

최근 그의 주변에서는 제3정당 창당 시나리오가 힘을 얻고 있다. 고 전 총리와 가까운 민주당 신중식 의원이 "민주당과 중부권 신당, 그리고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서 이탈한 정치세력을 한데 모은 수십 석 규모의 신당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07년 연말의 대선까지는 아직 2년 넘게 남았다. 이 점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기성 정당에 몸담을 거라면 막판에 결정하는 게 더 극적일 수 있다. 따라서 고 전 총리의 당면 과제는 어떤 방식으로 정치에 직접 뛰어드느냐의 선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장외에서 지지율을 관리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쪽에 무게가 실리는 느낌이다. 그는 4박5일의 홍콩 방문을 마치고 15일 귀국한다.

홍콩=이정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