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코널사관련 쌀도입파동전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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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의 양곡업자와 의원들이 연출해내는 쌀파동합작극이 또다시 한미양국관계에 파문을 만들고 있다. 문제의 양곡업자「코널」, 중간거래책 박동선씨의 역할을 저간의 사정을 살펴본다.

<코널>
「코널」가는 텍사스출신. 코널사는 현사장인 「그로버·코널」의 부친이 1912년에 창설했다. 코널사의 특징은 다른 곡물업자와 달리 자체 곡물창고·제분소, 또는 가공처리공장등을 갖추고있지않다. 순수 「트레이더」(Trader). 그대신 작황·식량수급예측용으로 완벽한 컴퓨터시설을 갖고있다. 미행정부도 참고로할정도.

<박동선씨등장>
68년까지 미공법(PL) 480호에의한 쌀거래는거래량의 80%를 컨티넨를사와 코널사가 지배했으며 상호관계는 무난한 편이었다.
양사가 대립하게된것은 67년 한국과의 쌀거래때부터. 당시 한국은 코널사로부터 캘리포니아산 쌀8만t을 살 예정이었다.
계약과정에서 한국측은 갑자기 계약자를 콘티넨틀사로 바꾸었다. 그러나 콘티넨틀사는 미처 쌀을 확보하지못한 상태였다.
이를 알게된 코널사는 모든 쌀을 매점했다. 계약을 체결한 콘티넨틀사는 물량을 확보하지 못했고 가격도 급상승했다.
마지못해 콘티넨들사는 코널사로부터 고가로 쌀을 매입하지 않을수없었다.
이때 등장한것이 박속선씨.
68년8월 박씨와 「코널」측 인사인 캘리포니아출신 H의원은 서울을 방문, 당시 김형욱중앙정보부장을 만나 쌀거래를위한 도움을 청했다. 「코널」은 처음 한국의 쌀거래 에이전트를 자청한 박씨의 청을 거절했으나 나중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사연도 틔게됐다.

<박동선씨 수입>
박씨는69년PL480호에의한 40만t의 대한 쌀판매 성사로 쌀도정공장협회(RGA) 로부터 t당 50센트씩 20만달러의 수수료를 받았으나 그후 코널사로부터는 수수료를 t당 95센트씩 올려받았고 70년에는 최소한 20만2천달러의 수수료를 코널사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72년3월 미농무성은 더이상 박씨를 코널사의 에이전트로 인정않는다는 통고문을 한국정부에 보냈다. 그후3년간 「코널」사는 변칙적인방법을 통해 새로운 에이전트로 대한농산을고용, 수수료는 동사워싱턴은행구좌에 지불했으나 실제로 그돈을 인출한 사람은 박씨였다.

<박씨·코널·기타미의원>
69년 박씨는 당시의 미하원의장 A씨의 한국여행을 H의원과 함께 도왔다. 이 여행에서 박씨는 미하원예산소위위원장으로 하원안에서 막강한자리에 있던 루이지애나주 공화당소속 P의원을 알게됐다.
P의원은 A의장을 수행, 서울에 왔을때 박정희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출신구 루이지애나주 창고에 가득한 쌀을 처리키위해 한국이 기왕에 일본과 맺은 40만t의 쌀수입계획을 취소하면 미국으로부터 쌀수입을 하는데 쓸 차관을 얻을수 있을것이라고 비쳤다.
P의원은 귀국후 「닉슨」대통령을 설득, 한국에대해 미국쌀 구매조로 8천만달러의 차관을 마련했다.

<코널의 행정>
P의원이 이같이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해 대일쌀구매계약을 취소키한것은 「코널」의 배후 조종이었다. 「코널」은 한국뿐 아니라 다른나라에도 영향력을 행사, 73년 자기네회사인 인도네시아에 8만2천t의 미국쌀을 수출키로 계약한후 P의원을 동원해 비미국산쌀을 사가도록해 결국 성사시켰다.
또 74년에는 역시 P의원을통해 대만정부 경제각료에게 압력을 가해 대만산 파인애플·버섯·아스파라가스등의 대스위스나 캐나다 수출허가를 받아냈다.

<코널과 박동선사건>
77년 미대배심은 박씨를 「의원모독죄」로, 「코널」을 탈세·밀수공동모의·허위신고등 6개항목으로 기소했다. 이중에는 72년미농무성에의해 제출된 박씨의 정체를 알면서 대한농산은행구좌를 통해 박씨에게 계속 수수료를 지불했고, 불법적으로 에이전트로 고용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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