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칼럼] 박근혜와 대구 민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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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호 31면

일주일 전쯤 대구에 며칠 머물 기회가 있었다. 장례 행사였던 덕분에 많은 사람을 만났다. 공기가 뭔가 달라졌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하지만 지난해와는 다른 분위기다. 절대적·무조건적 찬사가 사라졌다. 걱정이 많아졌다. 박 대통령의 근거지인 대구에 이상이 생겼다.

장례식장 로비 TV에서는 청와대 행정관의 협박 발언 의혹이 흘러나왔다. ‘문건파동 배후는 K, Y’라고 적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수첩도 비췄다. “(십상시 의혹이) 진짠가베”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새벽까지 술을 마신 대통령 측근들의 행태에, 안하무인의 언동에 혀를 찼다.

이런 불온한 공기는 수치로 나타났다. 20~22일 한국갤럽의 대통령의 직무수행 여론조사에서 ‘잘못하고 있다’가 60%로 ‘잘하고 있다’ 30%의 갑절이나 됐다. 리얼미터 조사에서도 신년 기자회견과 ‘문건 배후 수첩’ 파동을 계기로 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새누리당 지지도와 뒤집어졌다. 대구·경북, 50대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선거의 여왕’을 있게 한 ‘부동의’ 그 견고한 지지층마저 흔들린다는 의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장 꼽을 수 있는 게 신년 기자회견과 문건 수첩파동이다. 두 사건을 관통하는 한 가지는 소위 ‘십상시’ 의혹, 3인방 문제다.

“(비리, 이권) 그런 게 하나도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 비서관을 의혹을 받았다는 이유로 내치거나 그만두게 한다면 누가 제 옆에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단호했다. 23일 청와대 개편에서 결국 이들은 자리를 보전했다. 3인방을 위한 개편처럼 보인다. 특보단을 신설해 변화가 많은 듯이 소리를 냈지만 비상근이다. 민정특보는 로펌 변호사, 사회문화특보는 방송사 간부 일을 하면서 가끔 회의만 참석해도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그 정도라도 외부 목소리를 듣겠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민심의 요구를 묻어버리기 위한 방편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정말 3인방에게 아무 죄도 없을 수 있다. 그저 성실하게 심부름만 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재판관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가려서 심판할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민이 어떻게 믿고 있느냐다. 민심을 떠나서는 정책을 추진하는 동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민심은 가르치는 대상이 아니다. 달래고 설득해야 한다. 왜 그러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키지 않아도 조금씩 양보하며 다독일 수밖에 없다.

검찰은 문건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시중에는 그대로 믿는 사람이 드물다. 십상시 모임이 있었건 없었건 3인방이 문고리를 잡고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들이 대통령의 소통에 장애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대통령은 문을 열어주는 머슴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그들을 실세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회견과 이번 인사는 그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줬다.

박 대통령은 “그게(대면보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장관들에게 물었다. 장관들이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저 웃었을 뿐이다. 서면 보고를 하면 비서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문자로 할 수 없는 말과 기색과 느낌이 훨씬 더 많다. 장관은 전달하는 수석을 무시하고 보고서를 작성할 수 없다. 돌려받을 때도 수석에게 대통령의 반응을 묻게 된다. 수석이 부처를 알고, 차관이나 국장과 거래하면 장관은 허수아비가 된다. 수석마저 대면보고를 못하면 문고리를 잡은 사람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과 3인방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이유다.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에서는 행정관들이 설쳤다. “배 째 드리죠”라는 말도 거기서 나왔다. 대통령이 수시로 486 행정관들과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는 소문이 이들 팔에 완장을 채워준 것이다.

당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초기에 고전했다. 연금 개혁 문제로 부처 간 협의를 하려 해도 아래 직급을 보내고 외면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 국무회의가 끝난 뒤 노 대통령이 “유 장관, 잠깐 따로 차 한잔 하고 가지”라고 불렀다.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대 이후 다른 장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정치에 옳은 것과 그른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정치인은 종교인이 아니다. 더군다나 대통령은 국민의 교사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진실과 다른 것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겸손함, 관용성이 필요하다. 내가 편하기보다 국민이 편한 길을 택해야 한다. 국민을 가르치는 게 대통령의 임무가 아니다. 옳든 그르든 바로 그 국민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갈 책임을 떠안고 있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 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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