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지 못한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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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서울집에 다녀 오던날 밤 우리 부부는 통금도 없어진 터라 모처럼 심야데이트를 즐기다가 택시 합승을 했다.
『남매 두셨소, 좋겠시다.』 옆자리에 앉은 40대 후반의 남자분이 딸아이의 고사리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분은 아들만 4형제 두었는데 자식 키우는 재미도 못 느꼈고 그때는 자식 키우는 일을 아내에게만 맡긴 채 별 관심도 없었노라고 했다. 지금도 장성한 4형제가 모이면 온통 시끄러울 뿐 아기자기한 맛이 없다며 불평 아닌 불평을 했다.
그러자 앞좌석의 30대 남자가 복에 겨운 소리 말라는 듯 자기는 며칠전 두번째 딸을 낳았노라고 했다. 간호원에게서 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땐 속이 있는 대로 상해 정신없이 술을 마셨다고 했다. 자기가 장손인 탓으로 어른들께서 노여워하시면서 아들 낳을때까지 계속 낳아야 한다는 언질을 주셨다고 했다.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주눅이 들어있던 그의 아내 또한 아들을 낳을때까지 계속 낳아보겠다면서 흐느낄 땐 자신이 몸둘바를 모르겠더라고 했다.
그때까지 묵묵히 침묵하던 기사양반이『다아 배부른 말씀이오』하고 한숨을 훅 내쉬었다. 결혼한지 5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노라고 했다.『무자식이 상팔자라지 않소. 가지많은 나무 바람자는 것 보았소?』하며 위로하자『예, 그것도 다 자식가진 사람들이 만든 얘기지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릅니다』고 했다.
그날밤 세상 참 고르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자식을 낳는 일이며 키우는 일인 것 같다. 아직도 남아선호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태어날 아이에게 좋은 사주를 갖게 하려고 점장이에게서 생일 생시를 점쳐다가 그날 그시각에 맞춰 제왕수술을 하는 이들도 보았다.
아뭏든 아들이건 딸이건 낳는 것도 큰일이지만 키우는 일은 더더욱 큰인 것 같다.
김향 <인천시 남구 구월아파트 237동 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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