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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국감 때만 "고액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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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6일 재경위 국정감사에서 "고액권 발행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라면서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을 이같이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한은은 국감이 열릴 때만 이같이 주장한다. 정부가 "고액권은 부정부패를 조장할 수 있다"며 반대 방침을 고수하기 때문에 평소엔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박 총재는 이날 "(한은의) 힘이 없어 정부를 설득하지 못했다. 왜 (정부가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을) 몰라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국회의원들에게 되레 호소했다.

한은은 이번 국감 이후에도 고액권 발행을 별도로 추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재경부가 반대하는데 괜히 나서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로 끝날 모양이다. 한은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치고 빠지는' 전략을 쓴다는 느낌마저 든다.

부패.물가불안 등을 거론하며 고액권 발행을 외면하는 재정경제부도 문제지만, 한은의 이런 태도는 '무책임의 극치'라고 금융계 인사들은 지적한다. 근본적인 화폐제도 개선을 뒷전으로 미루고 도안 변경 등 땜질만 하면 막대한 재원이 낭비된다는 것이다. 한은이 내년 초 5000원권을 시작으로 2007년 1만원권과 1000원권을 새로 발행하는 데는 총 4700억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그러나 고액권을 함께 발행하면 1만원권의 40%(8억 장)가 고액권으로 대체되면서 연간 400억원을 절감할 수 있다. 또 연간 4000억원에 달하는 10만원권 자기앞수표 통용 비용과, 수표 대신 시중 현금 수요가 늘어나는 데 따른 통안증권 발행 이자 1000억원도 절감된다.

한은은 이를 잘 알면서도 정치인과 언론이 총대를 메줄 것을 바란다. "그렇게 시급하다면 정부와 국민을 더욱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나서라"는 국회의원들의 이날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김동호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