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비야의 길!

그때 왜 질문을 하지 못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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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비야
구호활동가
이대 초빙교수

“50대에 유학하면서 뭐가 어려웠어요?”

 곧 공기업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는 40대 후배가 물었다.

 “으음, 집중력, 암기력, 정보 수집력이 떨어지는 게 힘들었어. 토론식 수업도 만만치 않고. 그나저나 유학은 99% 엉덩이와의 싸움이라는 거 잘 알지? 나도 도서관 문 여는 시간부터 문 닫는 새벽 1시까지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었던 덕에 간신히 졸업했다니까.”

 겁주는 척하며 즐겁게 저녁을 먹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차, 했다. 유학 중 진짜로 어려웠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나는 수업시간에 질문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 평생 어느 자리에서건 주눅이 들거나 긴장해서 할 말을 못하거나 궁금한 걸 묻지 못한 적이 없는데.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모인 유엔 자문위원 회의나 구호 관련 대형 국제회의에서도 열심히 묻고 내 의견을 거침없이 피력하는데 말이다. 이런 내가 교실에서만은 무슨 트라우마라도 있는 양 한없이 소심해진다. 이걸 물어봐도 되나? 혹시 나만 모르는 건 아닌가? 선생님이 내 질문을 무시하거나 핀잔을 주면 어쩌나?

 수업시간에 입 다물고 있긴 했지만 소신껏 질문하는 다른 학생들의 용기가 부러웠다. 영국 고위 공직자의 특강 때 있었던 일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회담에 물꼬를 튼 중동지역 전문 베테랑 외교관이기도 하다. 강연 후 질문 있느냐고 했더니 30대 네팔 학생이 손을 번쩍 들며 “전 당신이 취했던 중동평화정책에 동의하지 않습니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 ‘아니, 저 친구가 어디다 대고 감히….’ 더욱 놀란 건 그 대사의 태도였다. 학생이 동의할 수 없는 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며 굉장히 긴 설명을 성의 있게 해주었다. 그 학생의 용기가 부러우면서도 속이 터진 건 나 또한 강연 내용에 전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는데, 왜 질문하지 못했느냐는 거다. 나야말로 그가 성사시킨 협상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직접 보고, 그 지역에서 구호활동까지 했던 사람 아닌가? 질문은 당연히 내가 더 많이 했어야 했다.

 수업시간 토론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다녔던 대학원은 각 나라 학생과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섞여 있어 토론이 매우 풍성했다. ‘근현대 중국 외교사’라는 30명 내외의 수업에서는 공교롭게도 원수로 지내야 마땅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중국과 대만,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학생들이 나란히 앉아 들었다. 처음에는 선입견 때문에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큰 논쟁으로 번질까 봐 살얼음을 딛는 듯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토론이 시작되면 입씨름이나 자기주장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아름다웠다. 현실에선 어렵지만 적어도 교실 안에서는 평화적인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지 않겠냐며.

 만약 우리 반에 북한 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내 토론 수준으로 보아 토론이 아닌 언쟁이 되었을 확률이 높다. 참 이상하다. 내 의견을 주장하고 설득하는 건 그런대로 하겠는데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말을 차분히 듣고 내 주장을 수정하거나 허점을 인정하는 건 수업시간 중이라도 너무나 어렵다. 토론 중 조금만 논리가 달리면 당장 말싸움 모드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논지 흐리기, 말꼬리 잡기, 인신공격, 얼굴 붉히며 언성 높이기…. 내가 수업시간에 어떤 식의 토론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해질 만큼 부끄럽다. 스스로 깊은 반성과 함께 피나는 훈련이 필요하지만 이게 단지 내 개인의 문제라고만 할 수 있을까?

 생각의 생각 끝에 이런 현상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의 부작용이고, 나는 이런 교육의 최대 피해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자기 합리화나 책임전가가 아닌 직접 경험을 토대로 한 날카로운 분석이라는 걸 믿어 주시길. 내가 초·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에게 질문을 할 수도 없고 질문을 한다고 선생님이 성실하게 대답해 주지도 않았다. 진도를 나가야 하고 전 과목은 토론이나 질의응답 과정 전혀 없이 무조건 외워야 했기 때문이다. 내 성향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학창 시절 특히 초등학교 수업 중에 선생님에게 수없이 질문했을 거고 번번이 그 질문은 무시당하거나 진도방해죄로 혼났을 것이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토 달지 말고 무조건 외우라니까!’라는 말도 무수히 들었을 거다. 지적 호기심과 기를 꺾는 이런 말들이 어린 내 마음에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질문을 제지당하고 의견을 주고받지 못하며 자라는 아이들, 제대로 된 어른들의 토론을 접하지 못한 채 크는 아이들. 그래서 토론은 말싸움이고 싸움이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굳게 믿는 아이들이 커서 어떻게 될지는 나를 봐도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이런 세상밖에 보여주지 못한 나 같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용기 있게 질문하고 차분하게 토론하라고 주문하는 건 참으로 염치없는 일인 것 같다. 마음이 무겁다.

한비야 구호활동가·이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