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정치권이 대법관 뽑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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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떻게 아직도 그걸 모르나. 대법관 명단 이미 정해졌다고 소문난 게 언제 적 얘기인데."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청사 안 엘리베이터 앞에서 판사 3~4명이 나누던 대화의 일부다.

최근 법원 내에선 올해 10~11월에 인선될 후임 대법관을 두고 '갖가지' 소문이 떠돌고 있다. 하나는 "이미 특정인 네 명이 정해졌다"는 것이었다. 한 달 전부터 회자됐던 이 소문의 근원지는 천정배 법무부 장관과 사법 연수원 동기들의 모임이었다. 천 장관은 이 자리에서 특정 인사들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거명했다(본지 9월 30일자 2면).

이에 대해 천 장관은 공보관을 통해 "법조계에 거론되는 후보 변호사 6~7명을 말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모임에 참석했던 한 고위 법관의 설명은 다르다. 그는 "장관이 3명에 대해서는 아예 '정해진 것 같다'고 했고, 한 사람에 대해서만 '2~3명이 경합 중'이라고 하더라"면서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나' 몹시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문은 법원 내에서 '대법관 0순위'로 꼽히던 특정 법관과 관련된 것이다. 판사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운 이 법관에 대해 정치권에서 '너무 엘리트여서 안 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이런 소문들로 인해 고위직 판사들뿐 아니라 평판사들도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 6년 경력의 한 판사는 "대법관 자리는 실력과 인품이 중요한 것"이라며 "대법관의 꿈을 가지고 묵묵히 재판에 전념하는 판사들은 '정치권의 기준'을 접할 때마다 자괴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대법관에 누가 적임자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준과 후보자가 정치권에서 먼저 흘러나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인사 문제로 사법부가 휘둘려 신뢰를 잃게 된다면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김현경 사건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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