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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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여보세요, 나예요. 우리저녁 외식할까요.』
『안돼, 내 곧 들어같께.』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의 개성없는 방들에서는 이제 차례로 불들이 켜진다.
4월이 되면서부터 가슴까지 죄며 기다려온 날이었지만 아빠는 기억조차 하는지 안하는지 전화를 뚝 끊고 만다. 혹시나 외식을 하자고 갑자기 불러내기라도 하면 서두르지 않기위해 아이들은 미리 예쁜 옷들로 챙겨 입히고 나도만반의 준비를 해둔 터였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지금 들어오실 수 있나요. 하고 내가 물으면 그는 언제나 바쁘다는 말만을 했었다. 자꾸만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들어온다는 말은 정말 위안이 되었다. 전화를 끊은지 20분도 채되기 전에 볼이 상기된 그가 돌아왔다. 물론 술탓이었겠지만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당신 손가락에 맞을지 모르겠어』앙증맞은 빨간보석상자 속에서 백금반지 한쌍을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봄날 특유의 바람이 불고 비가 진종일 오던 날, 지나칠 정도로 급한 그와 느리기만 한 내가 만난 것은 4년전 일이다.
그리고 2년전, 우리 형편으로선 좀 무리해서 큰집을 장만하기 위해 결혼때 주고받았던 패물들을 정리했었다. 그때 내가 가장 애석하게 생각했고 눈물까지 흘렸던 것은 약혼식때 받았던 백금 쌍가락지였다.
평상시 보석에 대한 미련이라든지, 장신구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나였지만 우리가 같은 운명의 배를 타기 위해 약속한 날이었기 때문에 그 반지에 연연한 나의정은 어떤 것보다 깊었다. 감격이란 이런 것이리라. 내 애틋한 마음을 그가 속속들이 읽어주고 있다는-.
아내와 남편이 된다는것은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눈빛만봐도 알수 있는 사이여야만 할 것같다.
더러는 주말의 TV드라머에 정신을 잃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의 식성에 신경을 쓰고 이마에 하나 둘 주름살이 생겨도 그의 앞에선 철없는 아이처럼 남의 얘기도 곧잘 조잘거리고,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보통여자이고 싶어진다.

<대구시달성구 범어1동우정아파트3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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