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 아시아] '퇴진의 미학' 꿈꾸는 고이즈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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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지난해 12월 아카호 낭사의 묘가 있는 도쿄 다카나와(高輪)의 센가쿠지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거의 매년 이곳을 찾아 아카호 낭사 47인의 넋을 기린다고 한다. [일본 지지통신사 제공]

9.11 총선 압승 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여기저기서 찬사가 쏟아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두되는 게 '임기 연장론'이다. 내년 9월까지를 임기로 정한 자민당 당칙에 구애받지 말라는 이야기가 많다.

실제로 그는 다음 중의원 해산 때까지는 총리직을 맡을 수 있다. "경제개혁을 위해 더 해 줬으면 한다"(오쿠다 히로시 일본게이단렌회장), "그가 이토록 자민당을 부숴놨으니 정리정돈할 책임도 있다"(모리 요시로 전 총리) 등 '지원 사격'도 매일 쏟아진다. 고이즈미는 "임기를 지키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마지못해 임기 연장에 응할 것"으로 내다본다. 정말 그럴까. 외부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고이즈미는 '퇴진의 미학'에 집착하고 있다.

◆ 아카호 낭사가 된 고이즈미=최근 고이즈미 총리는 임기 이야기만 나오면 혼자서 되뇌는 말이 있다. "'아카호(赤穗.현재의 효고현) 낭사(浪士)'는 마지막에 죽었다. 그래서 일본인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아카호 낭사'. 일본의 대표적 가부키 '주신구라(忠臣藏)'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다. 1701년 3월 도쿠가와 막부 시절. 아카호의 번주(藩主) 아사노 다쿠미노카미(淺野內匠頭)는 에도(江戶)의 중신 기라 고즈케노스케(吉良上野介)의 책략에 걸려 에도성에서 칼부림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에도성에서 칼을 뽑는 건 금기 사항이었다. 결국 아사노는 할복을 명받고 자결한다. 또 그를 따랐던 아카오 무사들은 낭인으로 전락한다. 복수심에 불타던 아카오 낭사 47명은 와신상담 끝에 1702년 12월 14일 기라의 집을 급습, 망군(亡君)의 원한을 갚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막부의 명령에 의해 전원 할복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302년이 지난 지난해 12월 14일. 고이즈미는 도쿄의 센가쿠지(泉岳寺)에 서 있었다. 바로 아카호 낭사 47명과 그들의 주군인 아사노의 묘가 나란히 있는 곳이다.

고이즈미는 향을 피우며 낭사 47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역경을 딛고 소망을 이뤄낸 뒤 장렬하게 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옛날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

고이즈미가 볼 때 아카호 낭사의 복수는 곧 우정 민영화 법안 통과다. 그리고 그들의 할복은 자신의 임기 준수다.

그는 지난해 여름 '주신구라'를 관람한 뒤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아카호 낭사' 방식에 집착한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하면 그의 임기 연장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 한다면 하는 고이즈미=고이즈미는 일본 언론의 정치부 기자들에게 "'오프 더 레코드'가 없는 정치인"으로 통한다. 좋게 말하면 자신의 발언은 자신이 스스로 책임진다는 신념을 관철해 왔다는 이야기다. 그는 2003년 11월의 한 자리에서 "65세가 되면 물러나 편안히 지내겠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의 나이는 올해 63세. 2007년 1월이 되면 고이즈미는 65세가 된다. 그렇다면 그의 임기(내년 9월)와 그가 말하는 은퇴 시기는 대략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의 선친 준야(純也)는 65세에 세상을 떠났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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