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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의 정상화는 청와대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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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1780년 여름 긴 여정 끝에 베이징에 도착한 조선 사절단은 그제야 건륭제가 열하(熱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뿔싸, 황제의 거처가 어딘지도 몰랐던 황제 칠순 축하사절단은 부랴부랴 동북쪽 400리 밖에 있다는 열하로 행마를 재촉한다. 사절단과 동행했던 연암 박지원의 기행문 제목이 『북경일기』 아닌 『열하일기』가 된 이유다.

 자칫 잔치가 파한 뒤 고개를 디미는 불경을 범할 참이니 얼마나 속이 탔을까. 짠 내 나는 진 땅을 달리고 굴러 천신만고 지각을 면한다. 사절단이 한숨을 돌릴 때 연암은 이상한 얘기를 듣는다. 베이징에서 열하까지 700리라는 게 아닌가. 필담을 나누던 중국 관리 학성이 말한다. “원래 700리인데 황제가 항상 이 먼 곳에 머물다 보니 친왕이나 대신들이 오기를 꺼리게 됐지요. 그래서 황제가 거리를 고쳐 400리로 줄인 겁니다. 항상 말을 달려 직접 와서 일을 아뢰라는 뜻이지요.”

 말 한마디로 300리를 잘라버리니 과연 황제다. 하지만 방점은 뒤에 찍힌다. 아무리 멀어도 직접 보고받겠다는 의지 말이다. 요즘 말로 ‘대면보고’다. 235년 전 청나라 황제는 깨닫고 있었던 거다. 오늘 우리 대통령이 모르는 것 같은 대면(對面)의 힘을 말이다.

 실제 글로 읽는 것과 말로 듣는 건 천양지차다. 연인끼리의 대화도 문자로는 쉽게 오해를 낳는다. “응”이라 답해도 “싫어?”라는 물음이 돌아올 수 있다. “응 ^^” 정도는 돼야 오해가 없다. 직접 말할 땐 피할 수 있는 오해들이다. 복잡한 내용을 한두 장으로 요약한 보고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혼자서 읽는 것과 설명을 듣는 게 이해의 정도가 같을 수 없다. 결단을 요구하는 보고서일 경우 특히 더하다.

 보고서에 늘 진실만 담기는 것도 아니다. 이익과 입맛에 따라 사심과 왜곡이 MSG처럼 버무려질 수 있다. 의존도가 높을수록 조미료 종류도 다양해진다. 대부분 직접 말할 때면 눈빛만으로 걸러낼 수 있는 불량 첨가물이다.

 대면의 진짜 힘은 따로 있다. 청와대가 대면보고에 취약한 구조라는 게 문제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름 아닌 토론이다. 보고받고 지시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머리와 머리 또는 머리들을 맞대 더 나은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역설적으로 청와대 구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 홀로 떨어진 집무실이면 어떠랴. 전임자가 “테니스를 쳐도 되겠다”던 드넓은 집무실에 혼자 있지 말고 사람들로 채우면 된다. 수시로 장관과 비서들을 불러 보고받고 모르는 걸 묻고 대답을 들으면서 이견을 제시하는 열띤 토론장으로 만들면 된다. 관저건 집무실이건, 비서동이건 식당이건, 심지어 청와대 뒷산으로도 사람을 부르는 ‘제왕적 대통령’이 되란 얘기다. 필요하다면 전문가도 야당 의원도 정중히 부를 수 있겠다. 이럴 때 비로소 비서실장의 말이 참 명제가 된다. “청와대 경내는 대통령이 있는 곳이 어디든 집무실이다.”

 그러려면 방마다 문을 활짝 열어놔야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통령 자신의 팀원인 장관들은 수시로 들락거려야 한다. 자유롭게 넘는 문턱에서 ‘문고리’는 절로 필요가 없어질 터다. 다른 게 소통이 아니다. 이렇게 소통해야 청와대가 정상인 거다. 장관은커녕 비서들조차 문 앞에서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건 정상이 아니다. 이 정부가 외치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청와대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비서실장도 다른 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솥을 깨고 배를 가라앉히며 도와야 한다.

 건륭제가 수도를 놔두고 열하에 머문 건 피서 목적만은 아니었다. 학성이 설명한다. “성군은 편안할 때도 위태로운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황제 스스로 최일선에서 변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대통령의 나라 사랑도 건륭제 못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건륭제의 그것이 빛을 발한 건 사람들을 불러서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안 했겠지만 대통령은 얘기를 듣고 토론까지 해야 한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한다면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