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6자 합의, 새로운 위기의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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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제4차 6자회담이 우여곡절 끝에 북한 핵 프로그램의 전면 폐기와 NPT 복귀 및 IAEA 사찰, 미국의 대북 불침공, 한반도의 완전 비핵화, 그리고 북한에 '평화적 핵 권리' 부여 및 경수로 제공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6개 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폐막됐다.

공동성명은 그동안 국제사회가 추구해 온 '북핵의 완전 폐기'라는 원칙과 목표를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핵 폐기'를 위한 시한(時限) 명시 등 구체적 방안과 절차가 제시되지 못해 사실상 해결된 것은 없다. 북한이 공동성명에서 '핵 폐기'를 약속했지만 '평화적 핵 권리'와 '경수로 제공'도 동시에 합의되었으므로, 그 우선순위를 놓고 대립이 재연되면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공동성명 채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새로운 위기의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북한은 지금까지 '선 핵폐기' 이전에, '평화적 핵 권리' 이름 하의 경수로 제공을 강력히 요구해 왔다. 경수로는 통상 평화적 목적으로 건설되지만 농축 재처리 능력 등 핵무장 핵심 기술이 포함되므로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핵무장이 가능한 것이다.

미국은 전력(前歷)으로 보아 북한을 신뢰할 수 없으며 북한에 어떠한 핵 프로그램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단 북핵의 완전 폐기 후에 민간 핵 프로그램을 허용하게 하자는 중국 측 안에 대해 수용할 뜻을 비친 것이 이번 타결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 핵포기'가 미국이 이번 타결에 동의하게 된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의장국인 중국의 교묘한 절충에 힘입어 공동성명에서는 '이른 시일 내에' 북핵 폐기,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 논의 등을 약속함으로써 양측의 주장을 모두 만족시키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북핵 폐기'라는 구체적 해결을 위해서는 제5차 회담에서 같은 논쟁을 벌여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북한은 가능하면 미국의 '핵포기' 압박 예봉을 피하면서 시간 끌기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북핵 문제에 관한 한 더 이상 "이대로 갈 수는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미국은 이제 공동성명에서 북한이 '완전 핵폐기'를 약속한 것을 근거로 대북 압박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이미 북한이 불응할 경우에 대비해 대안 모색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 대안에 북한의 폭정 종식과 김정일 정권의 교체 같은 방안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북한은 미국의 핵폐기 압박에 대해 '평화적 핵 권리'를 들이대며 경수로 제공을 동시에 요구하고 나설 것이다. 이미 북한은 미국의 '선 핵포기' 요구를 정면 거부하고, 경수로 제공 즉시 NPT 복귀 및 IAEA와의 협정 체결을 이행할 것이라는 외무성 담화를 20일 발표했다. 6자회담 공동성명 채택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개발 의지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김정일 정권은 온갖 구실을 새롭게 만들어 가며, 핵개발을 계속하고자 한다. 6자회담 기간 중에도 북한은 흑연감속로 건설작업을 계속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관계는 북핵 문제와 별개의 궤도를 그리며 전개되고 있다. 이제 표면적으로 북핵 문제가 원만히 타결된 것으로 간주됨에 따라 남북관계는 '북핵'과 관련 없이 더욱 상승 무드를 타게 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이미 국내 언론은 거의 모두 북핵 해결에 관한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다.

우리는 북핵 문제의 본질을 읽어야 한다. 공동성명의 채택은 서로 다른 꿈을 꾸는 동상이몽식 미봉책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정한 한반도 북핵 위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홍관희 안보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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