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네 탓이오' 대선 백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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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한나라당 기자실에는 예고없이 두툼한 하늘색 책자가 뿌려졌다. '선거법도, 선관위도 없었다'는 제목의 '16대 대선 부정선거 백서'였다. 2백20여쪽짜리 백서엔 50여장의 컬러 사진과 신문기사.도표가 가득했다. 공들인 티가 역력했다.

백서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왜 대선에서 졌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이나 진지한 내부 성찰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내부적 요인보다 DJ 정권이 펼친 공작정치와 탈법.불법 선거운동으로 질 수밖에 없었다"고 첫장에 적어 놓고는 대선 패인을 철저히 바깥으로 돌렸다. 노사모.검찰은 물론 선관위를 향한 원망과 분노.독설이 가득했다.

당초 한나라당이 이런 '화풀이' 백서를 내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1월 홍사덕(洪思德) 개혁특위 위원장은 "선거 패인 백서를 발간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이를 통해 다음 선거에서 역전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취지였다.

실제로 당 기획위는 선대위 본부별로 패인 분석서를 제출받았다. 그러나 기껏 모은 자료는 빛을 보지 못했다. "책임론이 불거져 내부 갈등이 우려됐기 때문"이라는 게 당 관계자의 해명이다.

물론 20만달러 수수 의혹, 김대업 폭로, 기양건설 의혹 등 선거도중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을 괴롭힌 공세들이 속속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고, 억장이 무너지는 한나라당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에 안의 허물은 덮고, 바깥만 탓해도 되는 권리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비록 그 양상은 혼란스럽지만 민주당이 대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당 개혁의 홍역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한나라당은 가볍게 보아선 안된다.

남정호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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