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아파트 10층의 물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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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딸아이와 나는 TV를 보며 오후의 나른함을 즐기고 있었다. 비가 계속 오락가락했지만 사는 곳이 아파트 10층인지라 물난리는 남의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더니 딸아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엄마, 베란다에 물이 넘쳐"하고 외쳤다.

난 반사적으로 베란다로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물은 베란다를 채우고 거실로 넘치는 중이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넘치는 물을 빈 김치통을 바가지 삼아 베란다 밖으로 퍼냈다. 그런데 이건 그냥 물이 아닌 물 반 왕겨 반이 아닌가. 그 왕겨가 문제였다. 방충망에 끼여 물이 밖으로 잘 나가지를 않았다. 나는 방충망을 열고 "빨리 빨리"를 외치며 딸과 함께 불어나는 물을 퍼냈다. 숨이 턱에 찰 때가 돼서야 물은 조금씩 줄어들 기미를 보였다. 가슴이 벌렁벌렁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곧바로 경비실로 연락했더니 연결이 안 되고 급한 마음에 관리 사무소로 전화했더니 옥상으로 갔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우리 집에 생긴 건가 의심이 들어 막대기로 베란다 배수구를 쑤셔보니 뭔가 꽉 막혀 있었다.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닌 것 같아 옥상에 올라가 보니 방수공사 중간이라 왕겨와 함께 온갖 부속물로 아수라장이었다.

내 말을 흘려듣는 직원을 보채 집에 내려와 배수구 통을 분리해보니 더 기가 막힌 광경이 나타났다. 배수구 통로에 굵은 전선이 윗집 아랫집으로 꽉 차 있었고 부속물과 왕겨가 그 틈새를 꽉 채우고 있었다. 빗물이 흘러야할 배수구에 전선이 가득 차 있는 게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다음날 관리소장에게 직접 와서 보라고 하니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전선 봉지만 수거해 갔다.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조치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황당한 우리 집 물난리는 이렇게 끝이 났다. 작은 물난리였지만 해마다 수해를 겪으시는 분들의 마음도 알게 되었고 이럴 때 수해를 입은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게 마음에 와 닿았다.

이병란(44.주부.서울창동)

*** 9월 23일자 소재는 '가을 동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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