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1)제79화 육사졸업생들(64)-「4·3폭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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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외견상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공격목표로 한 것처림 보이는 무장폭동이 5·10선거를 앞둔 4윌3일 제주도전역에서 일어났다.
폭도들은 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과 서청단원들에게 살상을 가하고 무기를 탈취해 갔다.
제주도안의 15개지서 가운데 14개가 습격을 받았고 한달사이에 경찰관 12명과 그 가족 6명, 공무원 5명, 민간인 37명등 60명이 피살됐다.
이중에는 서청단원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그 밖에도 경찰관 2명과 민간인 19명이 납치되고 45군데가 방화됐다.
이에 당황한 미군정청에선 뒤에 미24사단장이 되어 6·25때 북괴의 포로가 됐던 「딘」소장을 현지에 보내 조사케 한 다음 각도 경찰국에서 l개중대씩 차출하여 8개중대 1천7백명을 제주도에 급파했다.
연대장인 김탄열소령은 제주도 출신 연대기간요원들에게 사복을 입히고 휴가명목으로 출신지나 민간부락에 보내 진상을 알아오게 했다.
그들은 폭동의 원인은 경찰과 서청의 행위에 대한 도민들의 불만때문이라고 보고해 왔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일본과의 중계무역을 하여 해방후의 어려운 생활에 도움을 얻어왔는데 경찰이 이것을 밀수라고 단속하여 관련자들을 다수 구속하는 바람에 도민의 불만이 컸다는 것이었다.
당초 폭동의 목적은 그같은 혐의로 경찰에 잡혀간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한 계획아래 일어난 가족들의 난동인데, 여기에 좌익세력이 편승, 선동하여 엄청난 무장폭동으로 확대된 것같다는 보고였다.
폭도들은 9연대가 있는 모슬포주변이나 그곳의 지시에 대해서는 공격하지 않았고 그들의 주장이나 구호에로 좌익적 색채는 없었다고 한다.
9연대가 수집한 정보는 경찰의 주장이나 발표와 큰 차이가 있었다. 경찰은 이것을 남로당과 그 군사단체의 폭동으로 규정했고 폭도의 규모를 1천여명이라고 발표했던 것이다. 9연대에서는 폭도를 2백내지 3백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김익열 연대장은 경찰의 출동요청을 받고 보급관인 전순기대위(6·25때 대대장으로 전사) 를 서울로 보내 송호성·정일권등 한국인 고위층을 만나 상황을 보고하고 연대의 방침을 하달해 달라고 요구케 했다. 당시 통신선이 모두 폭도들에 의해 절단되어 있어 인편을 택했던 것이다.
서울을 다녀온 전대위는 고위층들이 제추도 사건을 치안사항으로 보고 그 진압은 경찰이 할일이지 군이 개입할 성격은 아니므로 신중을 기하라고 하더라고 보고했다. 그래서 처음에 연대는 폭도진압에는 출동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진압하지 못하자 결국엔 9연대에 진압명령이 떨어졌다. 폭동의 조기진압을 희망한 군경당국에선 경찰의 정보와 건의를 받아들여 제주도를 초토화해서라도 반란을 빨리진압하라고 명령했으나 김소령은 초토작전은 국내에서 같은 민족에 대해서는 안된다고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당시 9연대의 실제 병력은 1개대대 9백여명밖에 안됬다. 그래서 부산에 있던 제5연대에서 1개대대를 빼내 9연대에 배속시켜 지원케 했다. 이 대대는 공교롭게도 나중에 좌익으로 밝혀진 오일균소령이 대대장을 맡고 있던 부대였다.
충북 청원태생인 오일균은 45년 일본육사 61기로 입교했다가 그해 해방이 되는 바람에 귀국하여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7연대(청주)소대장으로 갔다가 육사로 옮겼다. 그가 육사에 있을 때 2기와 3기가 배출됐다.
오일균은 부산에서 대대를 이끌고 나와 48넌 4월10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했으나 폭동진압에 출동해 달라는 경찰의 요청을 받고도 이를 묵살했다. 아직 부대가 정비되지 않았고 상황파악이 안됐다는 이유였다. 그러고는 사병들에 대한 정신교육만 시키고 있었다.
정신교육은 대대장인 그가 직접 맡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주도 폭동은 경찰과 민간의 충돌이기 때문에 경비대가 달려 들 필요가 없다는 것. 과거부터 경찰은 경비대를 경시했고 이용하려 들기만 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제주도의 남로당 총책 김달삼, 인민혁명군 총칙 이덕구와 접선하여 경비대를 적화시켜 결국에는 반란군에 합세한다는 기본방침을 정해놓고 하나하나 공격을 추진해 나갔다.
이 방침에 따라 김달삼은 9연대장인 김침렬소령에게 만나서 얘기를 나누자고 협상을 제의해 왔고 연락원을 보내 구체적인 조건도 제시했다.
마침 김소령도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는 무장토벌보다는 선무가 필요하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대화를 모색하고 있었고, 연대고문인 「맨스필드」대령(제주도 군정장관 겸직)도 이에 동의하여 김소령이 김달삼과 만나기로 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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