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흑인 "지옥에 잘 왔다 … 부시 어딨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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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덮친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컨벤션 센터에서 2일 자신들을 돌보던 친척 여성이 허기와 피로로 실신하자 두 어린이가 놀라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뉴올리언스 시 당국은 시내 임시 수용시설 이재민들을 휴스턴·멤피스·샌안토니오 등으로 대피시키고 있다. [뉴올리언스 AP=연합뉴스]

"지옥에 잘 왔다. 이 손을 보라."

핏발 선 눈으로 기자에게 말을 걸어온 머시디스 콜린스(45.여)는 "물에 떠다니는 퉁퉁 부어오른 시체를 네 구나 이 손으로 들어올렸다"고 소리쳤다. 가족들의 생사가 확인돼야 버스를 태워준다는 시 당국의 얘기에 잃어버린 딸 같아 보이는 시체면 무조건 손을 뻗쳐 뒤집어 봤다는 설명이었다. "정부는 수천 명을 여기에 내팽개쳐 놓고 담요 한 장 가져다 주지 않았다. 우리가 짐승이냐. 부시는 어디 갔느냐." 그녀는 분노했다.

뉴올리언스 서쪽 주택가 메테리를 관통하는 I-10번 고속도로. 도로를 막아 임시로 만든 '코즈웨이 수용소'는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기자가 현장을 찾은 2일 0시30분(현지시간). 3000명 가까운 사람이 도로를 뒤덮은 쓰레기더미 사이에 펼쳐놓은 야전 침상에 누워 있었다. 모두 흑인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수백 명은 도로를 왔다 갔다 하며 동트기를 기다렸다. 기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가 흑인 이재민들과 하룻밤을 지샜다. 진동하는 악취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뉴올리언스 시 당국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지난달 29일부터 수퍼돔과 컨벤션센터 등 시내 7~8군데 시설에 수용했다. 그중 하나가 이곳이다. 이재민들은 자신들을 지옥에서 탈출시켜 줄 버스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발이 묶인 이재민들은 "차라리 물에 잠긴 집에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며 하소연했다. 그러나 현장을 지키는 시 관계자는 "전염병 우려 때문에 누구도 못 돌아간다"고 말렸다.

성난 이재민들은 정부와 백인들을 욕하며 흉흉한 민심을 드러냈다. 말보 워싱턴(34)은 "이라크에 보낸 미군 중 10분의 1만 있어도 이러진 않았을 것"이라며 "이 정부는 석유와 전쟁만 안다. 흑인들 삶은 안중에도 없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유언비어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흑인인 마이클 데이비스(45)는 "카트리나가 덮친 직후 흑인의 거주지인 저지대 둑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음이 들렸고, 30분 만에 물이 3m 이상 차올랐다"며 "백인들이 한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폭발음을 직접 들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들었다는 사람을 봤다"고 물러섰다. 백인 자원봉사자인 그레그 시스트렁크(43.간호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흑인들은 무슨 일만 터지면 아무 증거도 없이 백인 탓으로 돌린다"고 목청을 높였다.

오전 5시. 어두운 도로 저편에서 불빛이 다가왔다. 이재민들을 태울 이날의 첫 버스 행렬이 도착한 것이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흑인들이 순식간에 11대의 버스에 달려들어 긴 줄을 만들었다. 그러나 각 버스 출입구 가까이에 줄을 선 일부만 운 좋게 탈 수 있었다. 문 닫힌 버스에 필사적으로 달라붙은 흑인들을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떼어냈다.

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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