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종말과 시작(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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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종말 속에 시작이 있고, 시작 속에 이미 그 종말이 있다는 것을 단순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수사학의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식물학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는지도 모릅니다.
계절의 순환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그 직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직물들의 세계에 있어서는 종말과 시작이 고리 쇠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낙엽이 진다는 말은 곧 새잎이 돋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윤동주는 나뭇잎이 떨어진 자리마다 봄의 새 이파리들의 눈이 숨져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나뭇잎만이 아닙니다. 열매가 익어 떨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개체로 치면 죽음과도 같은 일입니다.
흔해빠진 그 비유를 봐도 꽃봉오리는 어린아이고 만개한 꽃은 젊음입니다. 꽃이 지고 열매가 맺는 장년기를 지나면 그것이 익어 떨어지는 노숙의 경지에 이릅니다. 나뭇가지에서 익은 열매가 떨어지게 되면 이미 그것은 생물로서의 성장과 변화를 끝내고 맙니다.
열매들은 꽃의 진정한 죽음들입니다. 아무리 향기로운 과일도 끝내는 썩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동그란 죽음 속에는 모든 그 과일 속에는 내일의 생명인 씨앗이 박혀 있질 않습니까. 그래요. 부패의 죽음 속에는 언제나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과일 속에 파묻혀 있는 씨처럼 죽음 속에 내세의 새 생명이 있다고 믿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던 셈이지요. 반드시 식물이 아니라도 종말 속에 시작이 있다는 순환과 재생의 논리를 인간들은 먼 옛날부터 발견했고 또 몸에 익혀왔던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깜깜한 방 속에「빚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책의 팔자가 아니라 하루의 시간 속에서 수백 번, 수천 번을 되풀이하면서 몸으로 직접 확인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추운 겨울의 눈발 속에서 따뜻한 아지랭이의 씨앗들을 보았던 것입니다. 방의 끝에 새벽의 빛이 있고 겨울의 끝에 봄의 새싹들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아닙니다. 식물이나 계절만이 아닙니다. 우주 자체가 거듭 태어나는 것들의 주기율표와도 같은 것이고, 죽음의 열매 속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그 종교의 텍스트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누에고치는 곤충들의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그 섬세하고 순결한 백색의 비단 열매 속에는 조금 전까지 뽕잎을 갉아먹던 누에들의 생명이 응결해 있습니다. 그것은 누에들이 잠자는 집, 죽음의 관이지만 동시에 나방의 날개가 돋아나는 내세의 생명 적인 공간이기도한 것입니다. 고치의 죽음은 무게를 가진 누에가 공기처럼 가벼워지는 새로운 생명의 변신술입니다.
바다의 조수와 하늘의 별자리에 이르기까지 이 순환의 법칙과 질서가 이르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스의 한 철인이 우주의 실체를「리듬」이라고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최초의 잠을 이루었던 때도 바로 그 리듬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를 잠재울 때, 토닥거리며 두드려주는 어머니의 손, 그리고 요람의 흔들림-그것이야말로 리듬의 언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 이해하였던 그 리듬은 본능의 언어로써 속삭였던 것입니다. 왜 나뭇잎이지는 가를. 어째서 그렇게 빛나던 햇살은 쉬이 어둠이 되고 들판을 욕망으로 부풀게 하던 여름 소나기는 금세 눈보라로 바뀌는 가를. 밝음은 어둠을 필요로 하고 더위는 추위와 등을 대고 모든 움직임은 정지 속에서 이루어지는 반대현상, 거기에서만이 리듬은 생겨난다는 원리를 당신은 최초의 그 잠 속에서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있어 그 최초의 잠은 바로 생을 읽는 최초의 독서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당신은, 문명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당신은, 종말 속에 시작이 있는 우주의 리듬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살면서 그것을 배웠지만, 당신은 기계의 공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계는 단지 반복을 할뿐입니다. 생명 적인 순환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곤충의 변신과 경이에 찬 그 계절의 변모 같은 것을 기계의 세계에서는 발견 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기계나 나방이 되려고 고치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래서 정지하게 된다면, 그것은 단지 고장난 기계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가 태어나던 날부터 믿어왔던 종말 속의 시작을 온 몸으로 체험해 보십시오. 끝도 시작도 없는 반복의 그 나날들에 황금의 종상부, 과일 속의 씨와도 같은 정적을 찍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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