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P 전 모스크바 특파원이 내다본 한반도 주변정세|"머잖아 소련은 한국에 손짓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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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를 통해 큰 변화 없이 비교적 안정세롤 보이던 극동일대에 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몇 가지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소련에 새 지도자가 등장하고 오래 계속되어온 중·소 분쟁이 부분적으로 해소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일본은 서 태평양에서 미국이 지금까지 맡아온 방위역할을 대신 떠맡는 방향으로 군비 증강을 할 조짐을 보이고 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이후를 겨냥한 승계 문제가 잡음을 일으키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의 바람에서 워싱턴포스트의 전 모스크바 특파원「로버트·카이저」씨는 소련이 새해에는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 신호를 더 많이 보낼 것으로 내다보았다. 장기적으로는 소련이 한국 상품의 시장이 될지도·모른다는 놀라운 전망도 하고 있다. 다음은 그런 내용을 골자로 한「카이저」현 워싱턴포스트 해절 판 편집장의 특별기고다.【워싱턴=장두성 특파원】
소련에 새 지도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제기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소련같이 관료제도가 경직되어 있는 나라에서조차도 개인의 특성은 정치현장에 파문을 일으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안드로프프」의 집권이 소련의 아시아관계와 같이 중요한 정책분야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중·소 관계 해빙된다>
이 질문에 대한 최상의 해답은 소련의 대 아시아정책에 변화는 오지만 그런 변화가「브레즈네프」의 사망이나「안드로프프」의 등장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국원 중에서 극동정책을 전담하는 것은「그로미코」의상과 각국 공산당 관계를 맡고있는「포노마료프」두 사람인데, 이들이 건재해 있는 한 극동정책기조가「안드로프프」개인의 영향력이나 취향만으로 급변할 가능성운 없다.
소련은 물론 그 자체가 아시아대륙에 속해 있는 세력이다. 소련역사를 통해 그들은 늘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터앉아 있으면서 양 대륙의 지리적 의치가 강요하는 딜레머를 해결하지 못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소련의 안보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동부보다 서부(유럽) 쪽으로부터 왔다. 그런데도 소련군이 근래에 겪은 총격전이 두 번 모두 아시아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소련군은 1969년 중공국경에서, 1979년부터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에 말려들어 있는 것이다. 아시아야말로 소련 외교상 지극히 예민하고 중요한 활동 장이 아닐 수 없다.
아시아에 대한 소련의 야망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시아의 변방을 안정되게 확보하고 아시아의 인방(이웃국가들)과는 최대한으로 유익한 경제관계를 견지하며 이 지역 전체로부터 존경받는 위치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강대국 취급을 받으려는 소련의 소망은 아시아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모스크바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들은 이제 배경과 그 동안 긴장했던 관계를 완화할 시기가 왔다고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결정은 소련으로서는 현명한 것이다. 그리고 중공이 소련의 의도에 호응할 경우 머지않아 이 거대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친근해질 걸로 예상해야 된다. 중공은 그럴 기미를 이미 보이고 있다. 나는 앞으로 6개월 안에 소련이 중공국경으로부터 몇 개 사단 정도의 상징적 군대철수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소련과 중공의 관계가 너무나 악화돼 있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관계개선이 모스크바와 북경간에 진정한 데탕트를 가져오지는 못하리라고 본다. 다시 말해 앞으로 양국관계에 대단한 접근이 이뤄지기 전에는 그 관계를 우호관계로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중공은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된 이래 국제문제에 있어 독자노선을 추구하면서 아시아의 인접국들 뿐 아니라 유럽·미국과 협조관계를 맺는 것이 얼마나 자기들에게 유익한지를 자각하게 됐다. 따라서 그들은 70년대에 쟁취한 외교적 독자성을 다시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이 때문에 중공의 대소관계는 중·소 분쟁 이전상태의 긴밀한 동맹관계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중공이 추구하고 있는 적극적인 독자외교 활동이야말로 오늘날 소련의 아시아 외교에서 근본적 어려움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일본과 관계개선을 못하고 있다. 일본은 70년대 중 적어도 경제면에서는 소련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보다 중공에 가까워지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결단을 내린 것 같다.
소련이 좌절감을 느끼는 또 다른 부문은 북한문제다. 김일성의 중공방문이 보여준 것과 같은 북한의 행동이 모스크바의 지도자들을 기쁘게 했을 리 만무하다.
또 김일성의 사망 후에 올 지도자승계 문제가 유동적인 상태에 머물러있는 점도 소련지도자들이 느끼는 불안감의 한 요인이 될 것 같다.

<서울 올림픽에 참가>
소련이 최근 한국과 관계개선을 원하고 있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는 것은 사질 그들이 북한에 대해 느끼고 있는 불안 내지 불만으로 절명할 수 있다고 본다.
소련이 한국에 보내는 신호는 물론 표면상으로는 가냘픈 것이다.
소련박물관 관리와 언론인 2명이 서울을 방문한 것을 가지고 외교적 공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련과 한국 사이에서 계속돼온 냉랭한 관계를 상기해 볼 매 이런 제스처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런 제스처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고 모스크바에서 세밀하게 계획된 행동에서 나온 것이 확실하다. 소련은 다른 경로를 통해 이들의 방문이 신중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을 한국정부에 전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련의 의도에 대해서 그들이 88서울올림픽에 선수단파견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동기가 그런 피상적인 것보다는 훨씬 더 실질적이라고 본다.
나는 새해에 소련이 한국과 보다 다변적 관계를 갖고 싶다는 소망을 알리기 위한 신호를 더 많이 보낼 것으로 생각한다.
최근 냉각된 소·북한 관계와 김일성 이후의 북한에 어떤 변화가 올지 모른다는 소련 측 불안감을 고려할 매 소련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수년 안에 한국과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해 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면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스크바의 일부 경제계획관이 한국상품을 수입해서 소련의 국내 소비상품의 고질적인 부족상태를 완화해 보려는 계획을 세우게될지도 모른다.
소련이 노골적으로 한국과 관계개선을 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이념상의 차이 때문에 공개적으로 한국에 접근할 경우 북한관계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되고, 만약 그 관계를 희생할 경우 소련은 제3세계 또는 각국 공산당과의 관계에도 심각한 마찰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소련이 당장 한국과 공개적으로 관계개선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생길 앞날을 위해 정지작업을 하고 있다고 본다. 관계개선의 잠재성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경제면에서도 한국이 현재 속도로 성장할 경우 아시아에서 중요한 공업국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때 가서 한국관계에서 소외되는 것을 그들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소련에서는 차차 생활수준 향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이 높아가고 있다. 2차 대전을 겪은 세대는 내핍생활이 몸에 젖어 있어서 소비상품이 부족해도 참고 견딘다.
그러나 전후세대가 중년을 넘어선 이제는 그런 기대감을 계속 연기할 수도 없는 상태다. 이 때문에 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 그때 지도자가「안드로포프」건, 그 이후의 인물이건 간에 생활수준 향상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압력을 크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때가 되면 싼값의 소비상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국 같은 나라가 필요하게 된다. 현재로서는 한국이 소련에 직접 수출한다는 말이 허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소련은 70년대 이래로 세계 공산주의 지도자로서의 지위가 크게 줄어들어 이념적 위치에 변화가 오고있다. 즉, 소련은 다른 공산국가에 대해 자기들의 지시를 따르라고 강요하기 어렵게 돼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련의 국제적 지배체제 붕괴는 역으로 소련자체의 행동반경을 넓혔다. 타국 공산당의 간섭 없이 그들도 독자적으로 정책노선을 추구할 여지가 넓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한국과 소련의 교역 같은 탈 이념적 국가관계의 가능성은 언뜻 보기보다는 요원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나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앞으로 있을 소련의 아시아정책 변화에「안드로포프」의 등장보다는 다른 요인들이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것 같다. 다시 말해「안드로포프」등장과 관계없이 소련이 아시아정책을 수정해야할 객관적 조건이 성숙해 있다는 이야기다.

<일 군비증강 가능성>
동시에「안드로포프」자신도 소련 외교의 색조를 바꿀 것으로 보이며, 아시아 각국과의 관개에 더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할 것 같다.「안드로포프」는「브레즈네프」보다 더 섬세하고 세련된 지도자다. 공산당서기장을 맡은 초기에 그는 외국과의 관계에서 보다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인상을 전하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본다.
80년대에 예상되는 극동지역에서의 세력재편…중동·북한의 유대강화, 한국·소련의 접근, 일본의 군비증강과 서 태평양에서의 미국군사력 대항, 또 중공의 한국탐색 움직임 등 현재 기미가 보이고 있거나 가능성이 보이는 여러 가지 변화는 기본적으로 한국을 둘러싼 전략균형을 한국에 유리하게 만들 것으로 본다.
한국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이미 공산권 안에서조차 퇴색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강화되어 중공과 소련으로부터도 그들의 주장은 점점 지지를 못 받게 될 가능성도 이런 결론을 뒷받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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