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마음과 현대인의 병|홧병의 정체(12)|이시형 <고려 병원 정신 신경과 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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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우리 민가에선 예부터 홧병이란 개념이 널리 쓰여져 왔다. 그 이름이 시사하듯 화난 일이 있어도 이를 풀지 못해 속에 쌈이면 변이 된다는 얘기다. 이런 질병 개념은 서양의 정신 분석학이 아직 1백년도 안된 것을 생각할 때 훨씬 앞서있는 것으로 우리 조상들의 정신의학적 식견이 뛰어난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현대 정신의학에서도 모든 신경증의 정신 기제가 억압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화를 억눌러 병이 생겼다는 홧병 개념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표현보다 억압을 미덕으로 쳐왔기 때문에 홧병은 서양보다 동양에, 특히 남자보다 여자에게 발병률이 높다는 건 쉽게 납득이 간다.
필자가 몇해전 홧병의 연구에 대한 발표를 했을 때에도 이런 경향이 아주 현저해서 여자 환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중년 여성에게 많았다는게 특징의 하나였다. 화난 일이 있어도 말로 표현을 못하므로 속으로 들어가 응어리가 된 채 남아 여러 가지 신체 증상을 일으킨다. 「속 앓이」「가슴앓이」 등이 주증이나 의학적 검사를 해봐야 가슴이나 속은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홧병의 원인은 우리나라 여성의 경우 「남편의 불성실한 가정 생활」이 제일 많아 전체의 6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다음이「곗돈을 떼인」경우 「자녀 문제」순이었다. 남자인 경우는 「사업 실패」나 「사기」 등이 대부분이었다.
증상은 초기에는 불안 증세가 두드러진다. 잠을 못 이루고 불안·초조, 그렇다고 누구에게 얘기도 못한다.
남편의 외도도 자존심이 상해 누구와 의논할 수도 없고, 겟돈을 떼어도 혹시 남편이 알까봐 쉬쉬하고 숨겨야하니 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 앓기다.
속은 타지만 화도 낼 수 없고 참고 지내자니 죽을 지경이다. 이런 급성기가 지나면 차츰 포기하고 체념하는 쪽으로 바뀌면서 전형적인 우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의 불안·초조와는 달리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밥맛도 없고 멍하니 넋잃은 사람처럼 된다.
괜히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편칠 않는 등 본격적인 홧병으로 옮겨간다.
이런 증상이 오래가면 본인 자신도 이게 홧병이 아닌 다론 신체 질환이 따로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병원을 찾아다니지만 이상도 발견되지 않거니와 치료해봐야 별 효험도 못 본다.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 있는 한 치료 될 리가 없다.
따라서 치료의 우선은 이런 신체적 증상들이 다름 아닌 홧병의 말기 증상임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 다음은 장담이나 정신 치료를 통해 그때의 억울하고 분했던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그간에 맺힌 감정을 풀어야 한다.
그리고 홧병을 안겨준 당사자에 대해서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야 한다. 생각할수록 괘씸하지만 그를 위해서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용서해야한다. 한해가 저무는 이때 묵은해의 모든 화들을 다 풀고 건강한 새해를 맞는 것도 건강 유지의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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