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소개, 토착화에 공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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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양화단의 원로 오지호화백의 타계소식은 미술계에 충격과 슬픔을 던져 주었다.
80년 세네갈등 아프리카여행에도 끄떡없을 만큼 노익장을 과시해오던 오화백은 지난봄 광주에서 있었던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최근 5개월간 반신불수·언어장애에 시달리며 투병해왔었다.
1905년 전남 화순군 동쪽의 한 부유한 집안의 3남으로 태어난 그는31년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 귀국후 연향회힉원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해방이후 창작활동의 자유와 민족미술확립을 열렬히 제창했으나 일제잔재세력이 살아남을 보고 크게 낙망, 낙향하여 최근까지 광주에 묻혀 지내면서 전남문화계의 정신적 지주가 돼왔다.
『누가 보아도, 언제 보아도 좋은 그림, 마음편히, 즐겁게 볼 수 있는 그림』을 회화관으로 지녀왔던 그는 자연에 대한 감격을 표현하고 나아가 그 감격을 전환하는 것을 작품세계로 추구해왔다.
승마와 술·담배를 즐긴 오화백은 화가들 사이에서 「멋장이」로 통할만큼 한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부인인 지양진여사와의 금실은 「잉꼬부부」로 세간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사회에 대한 봉사」를 생활철학으로 지녀왔던 그는 미술계 뿐만 아니라 국어학운동에도 앞장서왔다. 그가 사재를 털어 만든 국한문혼용 국교교과서는 바로 이러한 그의 철학의 반증이다.
오화백은 우리나라 서양화의 제1세대에 속하면서도 당대 국내화가들의 주류와는 달리 인상주의및 모던아트를 적극 받아들여 인상주의를 이론과 실제 양면에서 철저히 추구, 「조선의 자연과 전술」 「미감의 육체생리적 근원」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 국내 서양화 구상계열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인상주의를 국내에 소개한 초기 인물의 한사람으로 이의 토착화를 통해 한국적 인상주의를 뿌리 뻗게한 그의 공로는 미술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홍은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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