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안도의 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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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날 따라 김대법관의 목소리는 듣기에도 안타깝도록 알아 듣기가 힘들었다. 1시간이 지나도 판결문은 채 절반도 읽지 않은 상태였다」(당시 취재기자의 기록). 판결문은 공소사실과 상고이유에 대한 설명을 간추려 담고 있었다. 약1시간반이 지나 판결의 방향이 나오기 시작했다.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은 헌법위반이 아니다.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 역시 언론자유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불수없다」 이런 요지가 낭독되고 있을때 피고인과 변호인들의 얼굴은 활짝 밝아졌다.
조규택피고인등 젊은 피고인 몇사람은 손수건을 꺼내 기쁨에 넘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일순에 스쳐지나가고 더 깊은 절망과 슬픔이 파도쳐왔다. 「조봉암은 괴뢰의 지령을 받고…」라는 간첩사실에 대한 증거설명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1시50분 김대법관은 판결주문을 읽어내려갔다. 『피고인 김정학·양명산·이동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고인에 대한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 조봉암은 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전세룡·이상두를 각 징역2년에 처한다.』
당사자 조봉암은 피고인석에서 아무 움직임도 없이 목묵히 듣고있었다. 가슴을 죄며 법정 한구석에 앉아있던 조피고인의 외동딸 호정씨가 울음을 왈칵 쏟아놓더니 의식을 잃고 그자리에 쓰러졌다. 조피고인의 누님이라는 한사람의 여인도 대성통곡을 했다. 방청객도 한동안은 멍청해 있는듯 했다. 변호인들도 허탈상태였다.
판결은 끝나고 재판부는 곧바로 퇴정했다. 방청객도 하나 둘 자리를 떴다. 눈물이 뒤범벅된 가족들만이 일어설줄 몰랐다.
피고인을 환호의 순간에서 절망으로 이끈 판결의 핵심부분을 옮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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