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 로드 전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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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하비 로드의 전제」라는 말이 있다. 경제학자들이 매매로 인용하는 용어다.
이것은 원래 영국 경제학자 「R·F·해러드」의 명사 『케인즈전』에 나오는 말이다.
「하비 로드」(Harvey Road) 는 영국 케임브리지의 한 가노명 「J·M·케인즈」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한마디로 「하비 로드의 전제」란 『일국의 경제정책은 공명정신이 풍부한 지적 엘리트의 손에 맡겨져 있으며, 일반 대중은 이들 지적 엘리트의 정책 결정에 수동 적으로 적응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 특히 전후 미국의 경제를 움직여온 「케인즈」 경제이론이나 정책의 기본적인 대전제는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의회민주주의 시대에 이런 주장을 통째로 받아들이거나 옹호하기는 어렵다. 정치가들은 자신을 선출해주는 유권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유권자란 다중일 뿐, 엘리트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학자들의 토론에 맡길 일이고, 다만 엘리트의 정책결정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은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다.
관 주도, 혹은 관도의 사회에선 그 엘리트들이 관 안에 집중되는 경향이다. 민주도 사회에선 사회각분야에 흩어져 저마다 자신의 영역에서 창조적인 일을 하고 있다.
공공정신이 투철하냐, 않으냐는 그 사회의 도덕적 수준이나 분위기에 달려 있다. 이를테면 한 사회가 개혁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는 공공정신도 충만해 있기 쉽다.
그러나 사회환경에 따라서 공공정신과 엘리트가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공직자들의 공공정신은 왕성한데 그 주변에 엘리트가 모여 있지 않은 경우다.
가령 미국과 같이 재야에 더 많은 엘리트들이 머물러 있는 사회가 그렇다. 이런 사회에선 토론이 활발하다. 매스컴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엘리트의 의견이 충분히 흡수된다. 그보다도 엘리트를 정책결정에 직접 참여하도록 불러들인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적 엘리트의 참여가 없는 정책결정은 백가쟁오의 위험이 따른다. 그 만큼 사회가 불안해지거나 혼란에 빠지기 쉽다. 충격도 적지 않다.
물론 엘리트라고 완전주의자는 아니다. 심지어『7인의 경제학자로부터 의견을 들으면 8개의 답이 나온다』는 풍자도 있다.
이런 때야말로 얼마나 공공정신에 투철한가가 문제다.
최후의 척도는 바로 그 공공정신이다. 공공정신이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요즘 미국이나 일본에선 「케인즈 경제이론」에 대한 호의가 깊다.
그러나 「케인즈」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하비 로드의 전제」를 제시한다. 그대로 실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욕과 새로운 정책의 입소이 많은 우리나라는 어떤가. 궁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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