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3개국어 통달한 후 어학 공부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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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제 때인 30년 봄. 경성 제2고보를 졸업한 후 당시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인 경성제대 문학부에 입학, 우쭐한 기분으로 강의실을 들락거리던 어느 날 일이다.
언어학 강의실에서 만난 일본인 「고바야시·히데오」(소림영부)교수가 전공이 뭐냐』고 묻기에 서슴없이 『조선어학』이라고 하자 그는 재차 『몇 개의 외국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자신있게 『영어와 독어를 한다』고 했더니 느닷없이 『그렇다면 조선어학을 포기하라』고 꾸짖는 것이 아닌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나에게 그는 조용히 말했다.
어학은 언어학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그 바탕이 되는 언어학을 우선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락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영어 독어 외에 불어를 필수적으로 마스터해야 한다는 것 등이 훈계의 내용이었다. 즉 언어학에 관계되는 세계 각 국의 석학들이 쓴 논문을 자유자재로 읽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개 국어를 할 줄 알아야하며 이 같은 외국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어학 연구를 시작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고바야시」교수는 민족감정을 초월해 한국인 학생들을 대했다.
2학년에 진급했을 때 일이다.
그의 강의를 계속 듣기 위해 『언어학개론』을 선택했는데 「고바야시」교수는 의외로 언어학개론대신에 『독일방언』을 연구하라고 했다. 독일방언에 관계된 전문서적 10권을 주면서 한 학기동안 탐독하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자신의 숙소까지 불러들여 독일어 방언연구를 지도했다. 한 학기가 지났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독일어 원서를 줄줄 읽을 수 있을 만큼 독일어박사(?)로 변해있었다.「고바야시」교수의 숨은 뜻은 「방언연구」가 아니라 「독일어를 마스터」 시키는데 있었던 것이다. 이숭령<74·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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