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⑥남북관계] 56. ‘우리의 소원’ 통일을 찾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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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석한 임수경씨가 북한 여자 대학생들이 즐겨 입는 ‘조선옷’을 입고 북한 소년단원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다.

▶ 임수경씨가 방북 47일 만인 89년 8월 15일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넘어오고 있다. 이들은 귀환 직후 수사당국에 연행됐다.

분단을 뛰어넘으려는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은 1989년 봇물이 터졌다. 그해 3월 문익환 목사와 소설가 황석영씨, 6월 초 문규현 신부가 잇따라 방북했다. 곧이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통일의 꽃’ 임수경(당시 한국외국어대 4년)양이 참가했다.

특히 임씨의 방북은 남북한 사회 모두에 충격파를 던졌다. 7주 가까운 북한 체류기간 중 그가 보인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모습’은 북한 청년층에게 일시적이나마 ‘자유’의 바람을 쐬었다는 평가가 후에 나왔다. 남측에선 판문점을 통한 귀환, 재판 과정을 거치면서 정부의 남북 교류 독점 방침을 몸으로 부닥쳐 깨뜨린 상징적 존재로 부각됐다.

민간의 통일운동은 80년대 거셌던 민주화 바람에 힘입어 급물살을 탔다. 재야와 대학생 등은 특히 88년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개최를 통해 ‘통일 바람’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남북 당국의 소극적 자세로 올림픽 공동개최가 무산되자 이들은 대안을 모색했다. 당시 전대협 의장이었던 임종석 의원은 “올림픽을 단독으로 치른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며 “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남측 대학생들이 대거 참가해 국제사회에 남북 분단상황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에 대해 포용적인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는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 기도를 막기가 애매했다. 88년 12월 북한 조선학생위원회가 적십자사 채널을 통해 보낸 평양축전 참가 초청장을 정부가 직접 전대협에 전달하는 등 소극적이나마 전대협의 방북을 지원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였다. 그러나 전대협 측이 500명 규모의 방북단을 구성, 대대적인 참가의지를 보이자 ‘남북대학생교류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전대협의 움직임을 사실상 봉쇄하려 했다.

대규모 방북이 무산될 것으로 판단한 전대협측은 대표자만이라도 평양축전에 참가시키기 위해 비밀작업을 벌였다. 출국이 용이한 운동권 학생을 물색한 끝에 당시 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불어과 4학년이던 임씨를 선발했다. 그는 6월 20일 출국해 해외동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일본, 독일을 거쳐 평양축전 개막일 하루 전인 30일 평양에 도착했다.

임 의원은 “전대협은 임양에게 북한 체류기간 중 ‘남북 어느 쪽도 비방하지 말 것’‘반드시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귀환할 것’만을 지침으로 줬다”고 밝혔다. 89년 6월 30일부터 8월 15일까지 북한 전역을 누빈 임양은 이 지침에 충실했다. 막힘없는 즉석 연설과 스스럼없이 북한 청년들과 어울리는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통일의 꽃’으로 불리며 선풍을 일으켰다. 180개국에서 1만6000여 명이 참석한 평양축전은 임양의 독무대였다.

당시 평양의대 학생이던 탈북자 석영환(41) 씨는 “북한 정부는 ‘친북인사로 방북한 임양을 열렬히 환영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임양의 자유분방한 행동에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고 말했다. 임양 방북 이후 북한 대학생들은 ‘남쪽의 여대생 때문에 덩달아 날라리식으로 놀지 말라’는 주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임씨는 남북한 당국이 모두 반대한 판문점을 통한 귀환을 단식농성 등을 통해 관철함으로써 방북의 상징성을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임양은 귀환 직후 체포돼 3년5개월을 복역했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

89년 이후 40명에 1명꼴 북한 다녀와

지난해 북한을 방문한 남측 인원은 모두 29만4633명(금강산 관광 26만8000여 명 포함)에 달한다. 방문 목적도 경협, 식량과 의료지원, 학술회의, 공연, 이산가족 상봉, 평양과 백두산 관광 등 매우 다양하다. 6월에는 대북 지원단체인 남북어린이어깨동무의 지원으로 건설된 평양어깨동무어린이병원 준공식에 남측 어린이 11명이 참가하기도 했다. 1989년 이후 남측 주민 40명 중 1명꼴인 110만 명 가까운 사람이 북한을 다녀왔다.

이처럼 민간인들의 방북이 크게 는 것은 90년대 후반부터. 95~97년, 홍수와 가뭄, 냉해가 겹쳐 식량생산이 크게 줄면서 아사자가 속출하자 남측의 민간단체들이 활발하게 대북지원에 나서면서부터다. 곧이어 김대중 대통령 정부가 대북 지원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민간인들의 방북은 더욱 급격히 늘었다.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을 제외하고 민간인들의 방북을 주도하는 단체들은 6·15나 8·15 행사를 주도하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47개의 민간단체 연합체인 통일연대 등을 포함해 정계, 재계, 종교계 등 151개 단체에 달한다. 이들 중 46개 단체는 지난해 식량, 의약품, 생필품 등 1661억원어치를 북한에 제공했다.

정부는 2000년부터 민간단체의 대북지원 활동을 매칭펀드(민간단체 모금액의 30~40%를 정부가 추가로 지원하는 것) 방식으로 촉진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민화협의 정현곤 사무처장은 “한때 북측 관계자들과 협상 과정에서 얼굴을 붉히는 일이 다반사였었다”며 “접촉 횟수가 늘어나면서 이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일도 많다”고 말했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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