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⑥남북관계] 52. 55년 만에 울린 희망의 찬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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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예상을 깨고 트랩까지 영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두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말을 나누고 있다 (맨 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양측대표단이 참석한 백화원 영빈관 6월 15일 환송오찬 (가운데). 1998년 6월 소 떼를 실은 트럭이 16일 오전 통일대교 입구를 지나고 있다.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 25분. 김대중 대통령을 태운 대한민국 대통령 전용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잠시 후 환영 나온 북한 주민들의 만세 외침과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타났다. 그 순간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현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일말의 걱정에 횝싸였다. 바로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 참배 건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일정만은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을 수차례 밝혔죠. 그러나 북측은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확답은 주지 않았죠. 이런 상태에서 도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김 위원장이 공항에 나왔습니다. 물론 뜻깊은 일이었으나, 혹시 김 대통령을 태우고 그냥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지요. 마음속으로는 김 위원장이 그럴 분은 아니라는 생각은 있었지만요….”
다행히 승용차는 그곳을 거치지 않았다. 임 이사장은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교섭부터 마지막 성사 때까지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정상회담. 그러나 그 진통만큼 남북 관계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과거에는 정말 상상조차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불신과 대결의 시대를 화해협력의 시대로 전환시킨 것이다. 개성공단, 철도·도로 연결, 금강산 관광 등…. 식량·비료 지원에서, 심지어 비누· 옷·신발 등 생필품 원료 지원까지 당국 차원에서 다루는 단계까지 왔다. 비로소 남북이 ‘함께 사는 공동체’로 서로 가까이 다가서게 만든 것이다. 임 이사장은 “화해협력이 말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진 게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이 보여준 거침없는 행보는 우리 국민의 대북 정서에 쇼크를 넘어 충격을 주었다. 김 대통령에게 승용차 상석을 양보한다거나, 사진기자에게 ‘출연료를 내라’고 하는 유머 섞인 발언 등이 그것이다. 물론 ‘연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편견 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논란을 우리 내부에 처음으로 던졌다. 그만큼 남북 관계가 질적으로 환골탈태한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도 없지 않다. 정상회담 주역 중 일부가 대북 불법 송금에 따른 법의 심판을 받았다. 대북 접근 방식을 둘러싼 남남갈등의 심화도 해결 과제다. 정상회담 때 태동한 ‘우리 민족끼리’라는 북한의 주장은 아직까지 대남 교란의 냄새를 지우지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2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기대감이 다시 부풀어 오르고 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의 ‘6·17 평양면담’이후 쏟아지는 김 위원장의 ‘OK사인’ 때문이다.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6자회담의 재개는 물론 개성공단 확충, 북한 지하자원 공동 개발 같은 매머드급 합의가 속속 가시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차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남북 간 합의를 보다 구체화하면서 평화문제에 대한 논의도 이뤄져야 한다.

이영종 기자

소 떼·금강산 관광, 정상회담 길 열어

“판문점 군사 분계선 지역이 어떤 곳인데 남조선 영감태기에게 길을 연단 말입네까. 그것도 소떼까지 몰고 말입네다.”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의 첫 소떼 방북 이벤트가 이뤄진 1998년 6월 직전까지 북한 군부는 반발했다. 자신들이 관할하는 판문점을 넘어 방북하겠다는 정 명예회장의 구상을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당시 현대의 사업파트너인 김용순(2003년 사망) 노동당 대남 담당비서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 결과 김 위원장은 김 비서의 손을 들어줬다.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으나 굶주리는 인민들을 위해 달러가 필요하다는 김 비서의 설득을 김 위원장이 받아들였다는 후문이다. 북한 측 관계자는 훗날 기자에게 “용순 아바이가 없었더라면 군부가 꿈쩍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정 명예회장은 처음엔 소 500마리를 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이어 4개월 후인 10월, 501마리의 소떼를 다시 보냈다. 1001마리를 택한 건 1000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예견해 놓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는 그해 11월 금강산 관광 시작으로 이어졌고, 특히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의 토대를 닦는 데 기여했다. 정상회담의 주역이었던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현대와 논의 중인 많은 프로젝트가 성사되려면 남측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북측이 깨달은 게 정상회담 성사의 한 배경”이라고 말한다. 그는 “북한의 당시 경제 사정상 금강산 관광으로 인한 외화의 지속적 획득은 남측에 대한 북측 지도부의 발상을 근본적으로 전환케 한 요인이 됐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특히 지난 7월엔 내금강과 백두산 관광 합의 등으로 이어졌다. 개성공단 등을 포함해 이들 지역 대부분은 북한 군부가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하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전엔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2002년 남북 간 철도ㆍ도로 연결이 지지부진할 때 방북한 임동원 특사 일행이 보는 앞에서 김 위원장은 배석한 북한군 핵심 인사에게 “가능한 빨리 빨리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정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 이런 결과를 낳는 단계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어릴 적 소 판 돈을 훔쳐 고향인 강원도 통천을 빠져나온 정 명예회장. 그는 소떼 방북 기자회견에서 “이제 그 한 마리가 천 마리의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고 했다. 그런 그의 꿈은 실현됐으나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유지를 따랐던 아들 정몽헌 회장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 명예 회장의 소 떼 방북에 담긴 참 뜻이 진정한 남북 화해협력, 통일의 결실로 맺이지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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